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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May 04. 2022

잡초록

5월 잔디를 잡아 뜯으며, 잔디야 그 선을 넘지 말아 줄래?

손목이 시큰거린다. 괜찮아졌다 싶어 다시 아플 수 있단 생각은 해보기도 전에 주저앉아 잡초를 매었기 때문이겠지. 지난번처럼 손목을 아예 쓰지 못할 경우가 생길까 봐 이번엔 미리 한의원에 다녀왔다. 한동안 뜸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는 의사의 다정한 말에 허공으로 골괭이질을 해 보였더니 아- 하신다. ‘이제 한여름 되면 더 바빠질 텐데 큰일이네요’ 하기에 내가 선생님께 잡초를 맨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 곱씹어보다 단잠에 빠졌다.



잔디 ; 볏과의 여러해살이 풀. 높이는 5~10cm이며, 잎은 어긋나며 갸름하고 뾰족하다. 5월에 다갈색의 수상화가 총상 화서(긴 꽃대에 꽃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끝까지 피는 형태)로 줄기 끝에 피고 열매는 영과를 맺는다. 무덤, 언덕, 정원, 제방 따위에 심어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다. 산과 들에서 자라는데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어쩐지 잔디 사이사이에 다갈색 꽃이 올라왔더라니 잔디도 꽃을 피우는구나 싶어 반가웠다가, 이 꽃이 지고 씨가 날려 여기저기서 또 잔디가 피어오르겠지 싶어 고개를 절레절래. 어김없이 잡초를 맨다. 왜 시골 사람들이 새벽같이 일어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계절이 왔다. 오전 10시만 되어도 땡볕이 내리쬐는 정원에서는 눈도 또렷하게 뜨기가 힘들다. 종일 정원에 꽃구경하러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다가 하루 마무리하고 퇴근하려는 길에 그만 발길이 묶여버렸다. 지난주 내내 잡초를 맸고 그 이후로 비도 쏟아지지 않았으니, 잡초들은 아직 모른 체할 만하다. 근데 한동안 맨드라미 뿌리를 찾아다니느라 혈안이 되어있어 그런지 이번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잔디가 발목을 붙잡았다. 나의 정원에는 잔디와 잔디, 잔디와 화단 사이에 화산송이로 길을 내어 놓았는데,  어느샌가 화산송이길이 푸릇푸릇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죽었으려나 살아날라나 겨우내 맘 졸이게 할 땐 언제고 요리조리 잘도 뻗어있다.


모른 체 해 말아? 발걸음을 뗐다 붙였다 뗐다 붙이기를 여러 번. 분명 뭔가를 찾으러 가던 길이었는데 결국 내 손은 장갑을 끼고 골괭이를 꺼내고 있었다. 정원에 머물게 된 지 일 년, 작년에는 이맘때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5월에 잔디를 처음 식재했으니 부지런히 모래를 뿌리고 물을 주며 자리 잡아라 부디 잘 잡아라 바라기만 했다. 8월이던가 장마철에는 긴 다리를 쭉 쭉 뻗어나가며 이 나무 저 꽃 너나 할 것 없이 휘감고 다니는 이 잔디라는 놈이 잔디인 줄도 모르고, ‘검질(잡초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라는 단어와 이는 매야하는 것! 이라고만 머릿속에 입력해둔 터였다. 한도 끝도없이 걷어내며 와, 이 검질은 진짜 대단하네..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정원에 아직 푸른기라곤 돌지 않던 때, 그때만 해도 잔디 요놈의 정체를 알지 못했는데 땅 속에 감추고 있던 얼굴을 빼꼼히 드러내는 요즘 이제야 알겠다.

봄이 오기 전, 원데이클래스로 정원 가꾸기 수업을 들었더랬다. 잔디가 있다면, 꽃을 심을 거라면 엣지 작업을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엣지? 화단의 경계. 잔디가 다리를 뻗지 못하도록 하는 경계 말이다. 화산송이 길 위로 잔뜩 뻗어 나온 잔디를 잡아 뜯으면서, 말은 무념무상이라 했지만 별의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전문가에게 정원 설계비용을 주고 맡겼는데 왜 엣지를 안 만들어준 거지? ‘싸게, 저렴하게, 최소한의 비용으로!’를 누차 이야기했기 때문일까. 분명 잔디 관리가 쉽지 않다는 걸 알 텐데, 저렴하게 받고 했으니 사후관리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걸까. 직접 송이를 실어다 나르고, 잔디를 구하러 사방팔방 수소문해 그때야 돈 몇 푼 아꼈지만 지금은 사람을 고용해서 관리하는 비용이나 병원비가 더 나올 판국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쉽게 뜯어진다는 것. 흔히 검질이라 불리는 풀들을 매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왜 이렇게 툭툭 잘 떨어져? 나야 좋다만 이 친구들의 처지가 왜 인지 모르게 서글퍼진달까. 그렇게 여기저기 발 뻗으면 뭘 해, 호미질 한 번이면 아니 손으로 후루룩 훑기만 해도 이렇게 떨어져 버리는 걸 말이다. 괜히 한 가지에 깊게 몰두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들춰보는 내가 빗대어지기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가볍게 다가서는 만큼 쉽게 끊어지고 마는 인간관계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또 다양한 분야에서 능통한 N잡러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잡초가 뻗어나가는 발처럼 머릿속에도 징검다리가 펼쳐진다.


하다 보면 어느새 다시 머릿속은 백지가 되고, 다시 잔디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왜 아무도 나에게 엣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을까, 혹 말해주었는데 내가 듣지 못한 걸까. 왜 아무도 잔디에게 선을 넘지 마라 경고하지 않았던 걸까. 왜 아무도 나에게 잔디는 여기저기 발 뻗는 습성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지? 혹 말해주었는데 내가 듣지 못한 건가. 수차례 남탓 내탓을 돌고 돌아 이제라도 내가 잔디에게 말해야 할까. 앞으로도 매일같이 이렇게 넘어올 텐데.. 선을 넘는다. 문득 그만큼 선을 중요시한다 말하는 나는 과연 타인의 선을 잘 지키고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지난 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왔다. 매일 소주를 마시는 구씨, 그런 구씨를 이상하게 보지만 궁금한 주인집 아들 창희. 하루는 구씨에게 소주를 전해주러 들렀다가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집 안 냉장고에 소주병을 넣어둔다. 그러다 문 틈새로 초록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을 열게 되고, 빼곡하게 쌓인 소주병을 보고서는 스스로 치워주기로 마음먹는다. 창희가 동네친구를 불러와 함께 소주병을 치우는 모습을 본 구씨. 그만두라 몇 번을 말해도 계속되는 창희의 행동에, ‘넌 네가 싼 똥 누가 대신 치워주면 좋냐?’ 라고 말하며 불쾌해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드라마는 양쪽의 입장을 들려주는데 여기서 웃기게도 잔디가 생각났다. 명장면도 아니고 심지어 이어지는 장면의 대사가 명대사라면 차라리 그에 가까운데 잔디에 꽂혀 이게 머리에 박히다니 옮겨 적으면서도 웃기다.

동네친구 : 아니 창희가 어제 구씨네 불러서 갔는데 진짜 깜짝 놀랐다. 방 안에서 빛이 장난 아니게 뿜어져 나오는데 나 무슨 외계인 있는 줄 알았잖아. 가봤더니 방안에 소주병이 가득이야. 그리고 해가 또 그 방에 딱 떨어져 가지고 방이 막 후끈후끈. 둘이서 그거 치우다가 구씨한테 욕 바가지로 먹고, 아니 바가지는 아니었는데 좀 그랬어. 아- 청소해주다가 욕 얻어먹고 진짜 민망해 뒤지는 줄 알았네.

미정 : 도와달라고 했어? 치워달라고 했냐고. 근데 왜 함부로 들어가서 손대?
창희 : 그럼 봤는데 그냥 나오냐?
미정 : 인간을 갱생시키겠다는 의도가 너무 오만해
동네친구 : 에이 오만 아니야 혼자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양이었다고.
미정 : 혼자 버릴 수 없는 양을 혼자 먹었어. 그걸 들켰어
창희 : 뭘 들켜, 몰랐어 우리가? 동네사람들 다 알어!

.
.
다음 장면에서 구씨는 미정에게 말한다.

구씨 :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너무 열어줬어. 괜찮을 땐 괜찮은데 하.. 싫을 때는 눈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말하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 되고. 무슨 말해야 되나 생각해내야 되는 거 자체가 중노동이야.

내 경우에 빗대어보지 않을 수 없지, 언제나 그렇듯 선을 넘는 사람들은 나를 위하는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상대가 넘은 선이 불편한 내 입장에서는 너무 열어줬다며 자책으로 이어지고 말이다. 한동안 끈질기게 넘어오던 잔디 같은 존재를 끊어내느라 힘들었다. 근데 반대로 내가 선을 넘는 사람들은?으로 생각이 튀었다. 곰곰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 한두 사람이 떠오른다. 그를 위한다고, 혹은 나를 위한다고 선을 밟았다가 움찔, 선을 넘었다가 뒤늦게 후회한 일들. 그리고 돌아왔던 차가운 시선, 더 이상 애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얼마나 후회하고 슬퍼했던가. 휴우-사돈 남 말할 때가 아니다. 뭐 잔디에게야 선을 넘지 마라 경고한 적도 없고, 골괭이질로 위협을 했던 적도 없으니 선을 넘는대도 내가 뭐라 할 말은 없다만 앞으로 잔디를 보는 눈은 조금 더 냉랭해지겠지. 아유 오늘은  여기까지만 매자, 아니 조금만 더 할까? 에라- 이 길까지만 하자 하다가 해가 졌다.  앞으로도 끝이 없겠지만 별의별 생각의 길을 따라 정원에도 길 하나 내어놓으니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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