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 인한 나의 좋은 점인가, 그가 흘러와 내가 좋아지는가
근심이 가득한 정원가를 만났다. 오늘따라 화단을 밟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기에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된다며 진심으로 위로를 건넸다. 우리야 작은 공간이지만서도 거침없는 발길에 얼마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아왔나.. 그런데 이 넓고 정성스러운 공간의 주인은 오죽하랴.
목련을 좋아하세요? 정원에 목련나무가 많아서요.
내 질문에 정원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목련을.. 음 목련이 좋아요. 목련, 나무가 참 좋은 나무예요.
단순히 정원에 목련나무가 많기에, 여러 종의 목련나무가 심어져 있기에 정원가가 목련을 심히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아닐까? 아님 학술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걸까, 늘 궁금했었다. 어쩌면 우연히 만난 정원가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정해놓고 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답변과는 달리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떼는 정원가를 보며, 혹시라도 내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건 아닌지 조심스러워 입을 다물고 기다렸더랬다.
해질녘 햇살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정원을 뒤로하며, 정원가의 머뭇거리던 대답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대상을 목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혹은 자신의 그러한 의지가 담긴 답일지도 몰라. 목련이 좋아요, 목련은 참 좋은 나무예요. 그 한 문장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재촉하는 발걸음에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혼자가 된 오늘, 꼬리를 붙잡을 수 있게 도와준 문장을 만났다.
좋아한다는 말에는 늘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지 목적어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식물을 좋아하거나 동물을 좋아하거나 사람을 좋아하거나.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이 왜 좋은지를 생각한다. 편안하게 해 주어서, 혹은 마음이 잘 맞아서. 여러 이유를 곰곰이 따져 ‘좋아함’을 합리화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대상을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면 모든 행동이 용인될 거란 착각. 모든 문제는 이 그릇된 방식에서 비롯된다
식물과 나, 이소영
야생화, 들풀을 세밀화로 담고 글을 쓰는 작가의 책, 식물과 나. 식물원 산책 중, 식물을 찍겠다며 화단에 들어가 누워서 혹은 자신이 어떤 식물을 밟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며 사진에 심취해있는 사람들을 보며 쓴 짤막한 글의 한 꼭지를 읽으며 다시 그날의 정원가가 떠올랐다.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요, 여름의 꽃, 가을의 식물들이 안간힘을 다해 땅의 표면을 뚫고 나왔는데 말이에요. 오늘따라 많아도 정말 많네요.’ 하며 한숨을 쉬던 정원가.
지난날 남편에게 정원에 목련나무 한 그루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봄의 전령이기도 하지만 꽃보다는 한여름 햇살을 한 움큼씩 쥔 잎사귀가 참 멋있다 생각했었기에. 생각에 그치고 말았지만 잘한 선택이라 여긴다. 그리고 좋아하는 많은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져보기로 한다.
욕심과 허영을 내려놓고 그저 좋은가? 그로 인한 나의 좋은 점인가, 그가 흘러와 내가 좋아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