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 시대를 바꾼 패션의 여제

by M plus Paris

마들렌 성당 인근의 캉봉가(Rue Cambon) 31번지. 그곳의 거울 계단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 여인의 서늘한 시선을 상상해 봅니다. 오늘날 '샤넬'이라는 이름은 전 세계 여성이 선망하는 부와 성공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그 견고한 성벽 아래에는 지독한 외로움과 결핍, 그리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불온한 욕망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샤넬의 트위드 재킷을 걸치는 것은 단순히 유행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이 세상의 편견과 스스로의 비천함을 지우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생존의 전리품'을 공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샤넬이라는 거대한 신화 속에 박제된 인간 가브리엘의 숨결을 10가지 결정적 모티프를 통해 추적해 봅니다.



image.png Coco Chanel on the mirrored staircase at 31 Rue Cambon, 1962, by Douglas Kirkland


I. 오바진의 침묵과 더블 C의 기원: 결핍을 양분 삼아 피어난 미학


이야기는 샤넬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Saumur)의 한 구빈원에서 시작됩니다.

하루하루 떠돌며 장사하던 가난한 아버지, 그리고 늘 아팠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출발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12살의 가브리엘을 프랑스 코레즈 (Corrèze) 지방의 깊은 숲속, 안개 낀 오바진 수도원(Abbaye d'Aubazine) 에 버리듯 맡깁니다.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화려한 세상이 아닌, 수녀들의 검은 의복과 기하학적인 타일 바닥, 그리고 죽음보다 깊은 침묵이었습니다.


차가운 수도원 유리창에 얽힌 문양. 그것이 '더블 C' 로고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따로 있었습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어린 시절을, 우아한 이름으로 다시 쓰려 했던 한 소녀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연인 보이 카펠과의 이니셜을 겹쳐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자신의 결핍을 신비로운 이야기로 만드는 데 천재였다는 것입니다.


극도의 절제미, 그 단순함(Simplicité)은 바로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가난과 결핍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 Isabelle Cerbones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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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보이' 카펠의 전략적 투자: 여성 기업가의 탄생을 알리다



샤넬의 인생에서 단 한 명의 동반자를 꼽으라면 단연 아서 '보이' 카펠(Arthur 'Boy' Capel) 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08년경, 샤넬의 첫 후원자였던 에티엔 발산 (Étienne Balsan) 을 통해서였습니다. 발산의 아파트에서 모자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샤넬은 곧 자신의 재능을 펼칠 더 넓은 세상을 꿈꿨고, 카펠은 그 꿈에 날개를 달아준 '전략적 투자자'가 되었습니다.


1910년, 파리 캉봉가 21번지. 카펠은 이곳에 샤넬의 첫 독립 매장인 '샤넬 모드(Chanel Modes)' 를 열 수 있도록 임대료와 개업 자금을 전격 지원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여성이 혼자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보수적이었기에, 카펠의 신뢰와 투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샤넬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초기 계약상 기성복 판매가 제한되어 모자 전문점으로 시작했지만, 사업은 곧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카펠의 지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2년 도빌(Deauville), 1913년 비아리츠(Biarritz)로 매장을 확장할 때도 그는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샤넬은 누구에게도 종속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1915년에서 1916년 사이, 카펠에게 빌린 모든 투자금을 전액 상환하며 사업적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도움을 받았으나, 결국 자신의 힘으로 그 부채를 갚아나가는 과정은 샤넬이 추구했던 '주체적인 여성상'의 실천이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잔인했습니다. 1919년 12월 22일, 서른여덟의 카펠은 칸으로 향하던 중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샤넬은 사고 현장까지 달려가 통곡하며 일생의 가장 큰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슬픔은 훗날 칼 라거펠트에 의해 '보이 샤넬(Boy Chanel)' 백으로 탄생하며 영원히 박제되었습니다.


image.png Large Boy Chanel handbag in calfskin and ruthenium-finish metal. © CHANEL



III. 캉봉가 21번지의 지리적 직관: 성공을 설계한 전략



샤넬의 성공은 디자인력만큼이나 뛰어난 '위치 선정(Location)' 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첫 둥지를 튼 캉봉가는 단순한 골목이 아니었습니다. 인근의 포부르 생토노레(Faubourg Saint-Honoré)는 당시 상류층 귀족과 예술가, 연예인들이 모여드는 패션의 심장부였습니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부호들이 투숙하는 리츠 호텔(Hotel Ritz) 과 불과 몇 걸음 거리였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리츠 호텔의 손님들은 샤넬 부티크의 가장 잠재력 있는 고객들이었습니다. 샤넬은 에티엔 발산의 사교계 서클을 통해 배우와 명사들에게 자신의 모자를 직접 노출했고, 이는 즉각적인 입소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타겟 마케팅의 정석이었습니다. 모자 사업의 성공에 힘입어 그녀는 1921년, 같은 거리의 27, 29, 31번지까지 부티크를 확장합니다.


특히 31 Rue Cambon은 오늘날까지 샤넬의 본사로 기능하며 '파리 패션의 수도'라는 상징적 가치를 지닙니다. 그녀는 단순히 옷을 파는 곳이 아니라, 고객이 샤넬의 세계관을 경험하는 '모던 부티크' 컨셉을 이곳에서 완성했습니다. 캉봉가는 샤넬 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한 가장 완벽한 베이스캠프였습니다.



image.png © Douglas Kirkland



IV. 저지(Jersey) 소재의 혁명: 여성에게 선사한 활동의 자유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은 샤넬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남성들이 전장으로 떠난 파리에서 여성들은 일터로 나가야 했고, 더 이상 화려하지만 불편한 드레스에 자신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이때 샤넬은 당시 남성들의 속옷이나 노동자들의 작업복에나 쓰이던 흔한 소재 저지(Jersey) 를 겉옷으로 가져오는 파격을 선보입니다.


당시 상류층 여성들에게 이는 계급적 정체성을 뒤흔드는 모욕이자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코르셋을 찢고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부드러운 소재를 선택한 것은, 여성의 신체적 자유(Liberté de mouvement)를 향한 샤넬의 단호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녀는 패션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재정의한 지독한 전략가였습니다.



V. N°5: 보이지 않는 옷이자 가장 치명적인 무기



1921년,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와 탄생시킨 샤넬 N°5(Chanel N°5) 는 향수의 역사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이 이름에는 샤넬의 철저한 직관과 미신적인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에르네스트 보가 제시한 여러 샘플 중 그녀가 선택한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샘플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5'를 자신의 행운의 숫자라고 믿었던 그녀는 별도의 화려한 이름 대신 이 숫자를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단일 꽃향기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80여 가지의 성분과 화학 성분인 알데하이드를 과감히 섞어 '여성의 향기'를 추상화했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는 여제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던 그녀에게 N°5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여성이 지녀야 할 태도이자 보이지 않는 가장 강력한 의복이었습니다.



image.png © STAN HONDA / AFP




VII. 호텔 리츠의 그림자: 나치 협력과 모델후트 작전의 실체



가브리엘 샤넬의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논쟁적인 대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행보입니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그녀는 호텔 리츠에 머물며 독일군 정보국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연인이 됩니다. 2014년 프랑스 정보당국이 공개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샤넬은 나치 정보국 '아프베어(Abwehr)'에 소속된 공식 정보원이었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등록 번호는 'F-7124' 였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모델후트 작전(Operation Modellhut)' 입니다. 이는 샤넬이 과거 연인이자 친구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을 직접 만나 독일과의 비밀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했던 비밀 임무였습니다. 비록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법적 유죄 판결은 면했지만, 이 '스파이 활동'의 꼬리표는 그녀를 전후 프랑스의 배신자로 낙인찍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파리 시민들의 증오를 피해 15년간 스위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도덕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던 한 인간의 차가운 단면입니다.



VIII. 코스튬 주얼리: 계급의 권위를 무너뜨린 '가짜'의 당당함



"보석은 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식을 위한 것"이라며 그녀는 값비싼 보석 대신 모조 진주와 유리 구슬로 만든 코스튬 주얼리(Bijoux fantaisie) 를 선보였습니다.


이는 계급의 상징이었던 보석의 권위를 무너뜨린 파격이었습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무는 그녀의 도발은, 외면의 화려함보다 내면의 스타일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그녀만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진품이란 가격표가 아니라, 그것을 소화해내는 여성의 당당함과 개성에 있었습니다.



IX. 71세의 화려한 귀환: 2.55 백이 선사한 손의 자유



15년간의 긴 침묵과 망명을 끝내고 1954년, 71세의 나이로 파리에 돌아온 그녀를 향해 비평가들은 "이미 끝난 시대의 유물"이라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샤넬은 굴하지 않고 여성을 위한 가장 혁신적인 아이템, 2.55 백을 내놓습니다.


가방을 손에 들고 다니는 번거로움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군인들의 가방에서 착안한 체인을 단 이 발명은 현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그녀의 말은 이 시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낸 노장의 포효와도 같았습니다.



image.png © Henry Clarke, Paris Musées / Palais Galliera / ADAGP. Copyright Agency



X. 호텔 리츠의 마지막 밤: 고독한 전설의 서늘한 마침표



수많은 남자의 연인이었으나 누구의 아내도 되지 않았고,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으나 정작 자신은 늘 고립된 섬이었던 그녀. 1971년 1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그녀는 평생의 안식처였던 호텔 리츠의 침실에서 홀로 숨을 거둡니다. 일요일은 그녀가 평생 가장 싫어하던 요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일을 하지 않는 적막한 날이었기 때문이죠.


"이것이 죽어가는 방식이군요(C'est ainsi qu'on meurt)"라는 마지막 말은, 평생 치열하게 생존과 싸웠던 한 혁명가의 고단한 마침표였습니다. 그녀는 죽음마저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가장 우아하고 고독하게 기획했습니다.




파리지앵의 시선: 결핍을 서사로 바꾸는 '자기 주도적' 생존의 미학



가브리엘 샤넬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단순히 한 디자이너의 성공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결핍을 어떻게 미학적 가치로 치환할 것인가' 에 대한 치열한 인문학적 성찰입니다. 그녀는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지우려 애쓰는 대신, 그곳에서 마주한 무채색의 규율을 자신만의 시그니처로 정의 내렸습니다.


특히 캉봉가 부티크의 위치 선정에서 보여준 그녀의 비즈니스적 직관은 오늘날의 리더들에게도 큰 시사점을 줍니다. 성공은 단순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제품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을 점유하는 것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걷어내야 할 '코르셋'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결핍의 자리에 채워 넣을 여러분만의 '스타일'은 무엇입니까? 샤넬의 흑백 대조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거대한 서사는 파리의 돌바닥만큼이나 단단하고 차갑습니다. 그녀의 삶이 남긴 유산은 단순히 명품 가방이 아니라,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지독한 열망일 것입니다.



image.png The funeral of Coco Chanel at the Church of the Madeleine (Église de la Madeleine), January 13,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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