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사람에게 귀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술자리 예법
술에 대한 '멋' 을 논하자면 보통 여러 가지 술들의 독특한 맛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맥주, 와인, 막걸리 같은 주종(酒種) 을 구별하거나, 같은 맥주를 먹더라도 에일과 라거는 어떻게 다르고 수제 중에서도 바이젠과 필스너는 어떻게 다르고 이런 것들을 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개별 브랜드 별로도 독특한 맛을 논할 수도 있겠죠.
*에일(Ale) : 영국에서 유래된 상면 발효식 맥주. 상대적으로 고온인 15~24℃ 에서 발효시키며 색이 짙고 쓴 맛이 강함.
*라거(Lager) : 독일에서 유래된 하면 발효식 맥주. 10℃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킨 뒤 낮은 온도에서 저장하여 숙성시킴. 탄산이 많아 청량감이 강함.
*바이젠(Weizen) :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역에서 유래된 상면 발효식 맥주. 보리 대신 밀의 엿기름을 사용하며 일반적인 맥주에 비해 밝은 색을 띄어 백맥주(Weiβ; 바이스)라고도 불림.
*필스너(Pilsener) : 체코의 플젠 지역에서 유래된 하면 발효식 맥주. 홉을 많이 사용하여 일반 라거보다 쓴맛이 강하지만 에일에 비하면 바디감은 적은 편.
그런데 여기에서는 좀 다른 얘기를 꺼내보고자 합니다. 술은 종류가 워낙 많고 또 각자의 기호가 천차만별이라 주종을 논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예법은 정답은 없더라도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죠.
여기에서는 흔히 '주도(酒道)' 라고도 하는 술 마시는 예법에 대해 얘기해 봅니다.
예법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고리타분하죠.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부터 비롯된 오래된 관습을 따르는 것인데, 시대가 이렇게 변했는데 그걸 그대로 따라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차례나 제사상을 차리면서 홍동백서(紅東白西)니 좌포우혜(左脯右醯)니 과채탕적(果菜湯炙)이니 이런 진설법 을 따라야 한다고 하면 '거 왜 그래야 되나' 싶기도 한 게 사실이죠.
*진설법(陳設法) : 제사상에 제물을 놓는 상차림에서의 규칙(예법).
그런데 예법을 지키는 쪽에서 보면, 예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 입니다.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는데 기본적인 예법도 모르면 주위 신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처음 왔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겠죠. 기본도 모르면서 왜 신성한 미사에 와서 주위를 어지럽히냐고 생각하겠죠.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 좋자고 마시는 술인데 예법을 꼭 따져야 하느냐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존중한다면', '앞에 놓인 술을 귀하게 생각한다면' 예법을 어느 정도는 따라야 한다고 말입니다. 로마에 갔으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기왕이면 기계적으로 술자리 예법을 따를 게 아니라 그 예법의 유래나 의미를 좀 알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술자리의 '멋' 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관혼상제' 를 배우셨을 겁니다. 성인이 되는 의식인 관(冠)례, 그리고 결혼에 관한 혼(婚)례, 사람이 죽었을 때의 장례에 관한 상(喪)례,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 등을 모시는 제(祭)례입니다.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기본적인 4가지 예법(四禮)입니다.
그런데 이게 확장된 6가지 기본 예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혼상제 4가지에, 각 고을에서 지켜야 할 향례(鄕禮), 그리고 사람이 처음 만날 때 지켜야 할 상견례(相見禮) 를 추가하여 육례(六禮)라 부릅니다. 이중 항례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구체적으로는 향례를 정리한 문헌인 <향례합편(鄕禮合編)> 등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예법이 바로 '향음주례(鄕飮酒禮)' 입니다.
'향음주례' 는 간단히 말해 귀한 사람을 대접하는 술자리 예법입니다. 이는 옛날 중국에서 고을의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면서 하는 일종의 송별연에서의 예법이었다고 하며, 때로는 고을의 통치자가 경내의 어진 사람이나 어르신들을 접대하는 잔치에서의 예법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참고하여 세종대왕 등이 우리나라의 예법으로 승화시킨 것이 향음주례입니다.
귀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술자리는 '군음(群飮)' 이라고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이 어울려 마시는 것이죠. 하지만 군음이라고 고주망태로 마구 마시는 것은 아니고, 향음주례의 기본적인 예법은 어느 정도 따르면서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향음주례의 여러 절차는 굳이 몰라도 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술자리 예법의 기본 정신은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경의와 존중이었다는 것이죠.
(* 혼자 술 마시면 '동물원 원숭이' 가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제사상이나 차례상에는 어김없이 술이 오릅니다. 전생에 술을 잘 못 마시던 사람도 있었을 것인데 무조건 술이 올라갑니다.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술을 따르는 그 절차 자체가 제사이고 차례입니다.
왜 하필 술이었을까요? 그것은 술이 가장 귀한 음식 중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가난이 심해서 더욱더 술이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양식이 없어 산에 있는 나물을 캐어 먹고 그러는 마당에, 곡물로 끼니를 때우지 않고 술을 만들었으니 그 술이 얼마나 귀한 음식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여러 왕들이 수시로 금주령을 내렸던 기록이 있습니다. 백성이 굶주리는 마당에 술은 사치라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꼭 우리나라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존중', '존경' 등에 쓰이는 높을 존(尊) 한자를 보면 술(酒)을 뜻하는 우두머리 추(酋) 변 이 들어가 있습니다. 尊 글자 자체가 술잔을 위로 높여 드는 모양이며, 글자 그 자체로 술잔을 뜻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술그릇 준). 술이 귀한 음식이라는 생각은 중국도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 가지 술자리의 예법들이 바로 이와 같이 술이 '귀한 음식' 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혼자 술을 마시거나(혼술) 혼자 술을 따르는(자작)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는, 귀한 음식인 술을 혼자 먹지 말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 술은 제사든 차례든 성묘든 빠지지 않습니다.)
모든 예법이 그러하지만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제사상 진설의 경우, 이걸 그대로 따르자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음식들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육고기와 물고기가 동시에 올려져야 하고, 포와 식혜가 올라가야 하며, 3가지 이상의 나물 반찬이 올라가는 등 이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술자리 예법 역시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면 좀 피곤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현대에 맞게 해석해야 하는데,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술자리 예법의 기본 정신을 알고 그 취지에 맞게 행하는 것입니다. 기본 정신이라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①귀한 음식으로서의 술에 대한 존중, 그리고 ②술을 함께 나누는 사람에 대한 존경 입니다.
이를테면 아랫사람에게는 술을 한 손으로 따라도 된다라는 것은 위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상대가 지위가 낮건 나이가 어리건 이 자리에서 나와 술을 함께 나누는 사람은 존경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두 손으로 따르는 게 맞습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왕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술을 하사할 때에도 두 손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본인이 왕도 아닌데 나이가 많다고 한 손으로 따라도 된다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③과음하지 않는 절제 입니다. 이는 동서고금 공통입니다. 따라서 과음을 부추기는 소위 '원샷' 등은 절대 우리 전통적인 주도가 아닙니다. 이는 술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바로 따라줘야 한다는 일본식 주도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우리나라에 잘못 주입, 변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즐길 사람은 즐기되 주량이 적은 사람은 술잔을 여러 번에 나눠 마시는 것도 당연히 가능해야 하겠습니다.
술잔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일단 술잔을 가득채우면 과음을 부추기게 되고, 또 가득 찬 술잔을 마시다가 술을 흘리거나 옷에 적실 가능성도 생깁니다. 그 귀한 술을 말이죠. 오히려 와인 같은 술은 잔에 가득 채우지 않는 것이 서양의 술자리 예법입니다. 와인의 향을 코로 음미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면 우리나라에서 첨잔(술이 남아있는 술잔에 술을 더 따라주는 것)이 금기시되는 것은 과거 첨잔이 제사 등에서 쓰였던 방식이기에 그렇습니다. 많게는 십여 명까지 제사를 모셔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술이 너무 귀했기에 첨잔하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첨잔은 죽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이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