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연기, 그리고 개연성
벌써 2월도 한 주가 지났다. (대충 또 지난달 결산을 밀렸다는 뜻.) 지난달에는 총 15편의 영화를 보았다. 개중에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작품도, 도무지 남들의 호평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도 있었다. 유독 “개연성”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되었던 2026년 1월의 영화들. 그중 기억에 남는 8편을 추려본다.
아버지의 세 딸들 (아자젤 제이콥스, 2024)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소원했던 세 자매, 케이트(캐리 쿤), 레이첼(나타샤 리온), 그리고 크리스티나(엘리자베스 올슨)가 좁은 아파트에 모인다. 성격도, 삶의 방식도 다른 세 사람은 충돌과 침묵을 반복하며 힘겹게 며칠을 보낸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라는, 서구 영화에서는 다소 흔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그 흔함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좁은 집 안에 갇힌 세 딸의 긴장이 임계점에 다다를 때쯤, 비로소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그제야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가 등장한다. 인물들의 심리적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독특한 촬영 구도가 퍽 인상적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듯, 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포착해 낸 수작.
다우트 (존 패트릭 샌리, 2008)
1964년, 브롱스의 한 가톨릭 학교. 엄격한 원칙주의자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플린 신부(필립 시모어 호프만)가 한 흑인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며 신부를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흔히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얼굴이 개연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익숙한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어쩌면 연기력이 개연성이 될 수도?'라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냉정하게 뜯어보면 정황 증거뿐인, 오로지 "의심"에서 시작된, 자칫 억지스러울 수 있는 전개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과 필립 시모어 호프만, 두 배우의 미친 연기가 그 틈을 메우다 못해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간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과정에 논리는 필요 없다. 그들의 눈빛이 곧 서사니까. (아니면 그만큼 "의심"과 "소문"이라는 건 걷잡을 수 없이 무서운 걸지도?)
로스트 인 더스트 (데이빗 맥킨지, 2016)
빚더미에 앉은 농장을 지키기 위해 은행 강도가 된 형제 토비(크리스 파인)와 태너 (벤 포스터), 그리고 그들을 쫓는 베테랑 형사(제프 브리지스)의 추격전.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 위로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드니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을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다 보고 나서야 알았는데, <기차의 꿈>과 달리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없다. 그런데도 마치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묵직한 단편 소설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서사가 탄탄하다. 표면적으로는 현대판 서부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은 의외로 잔잔하고 문학적이다. 은행을 터는 형제의 범죄가 옹호될 순 없겠지만, 영화가 흐를수록 그들의 행동 동기에 기어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흙먼지 냄새가 나는, 한 편의 소설처럼 흘러가는 영화.
더 레슬러 (대런 아로노프스키, 2008)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병든 몸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레슬러 랜디(미키 루크).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레슬링을 그만두려 하지만, 링 밖의 세상은 그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결국 그는 다시 링 위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나인 하프 위크> 시절의 그 꽃미남 미키 루크가 이렇게나 망가진 얼굴로, 한때 잘 나갔던 레슬러를 연기한다. 이건 연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보는 내내 마음이 너무 짠해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극 초반 지나가듯 나온, 랜디에 대해 한 꼬마가 언급한 "그래도 사람은 착해"라는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그래, 사람은 착하다. 험하게 생겼고 레슬링밖에 몰라서 그렇지. 스크린 밖으로까지 전해지던 그 짠내와 고독.
에비에이터 (마틴 스콜세지, 2004)
억만장자이자 영화 제작자, 그리고 비행사였던 하워드 휴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야망과 강박, 그리고 몰락을 그린 전기 영화.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마틴 스콜세지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방식은 뭐랄까, 내게는 좀 알쏭달쏭하다. 감정을 느껴야 할 영화라기보다는 잘 만든, 건조한 다큐멘터리 같다. 비주얼은 압도적이지만 가슴을 치는 감동은 부재한다. 다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패션만큼은 정말 인상 깊었다. 그냥 멋진 배우들 보는 맛으로 본 영화.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2025)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재해석한 고전.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다.
사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타지 동화풍 영화들에 큰 흥미가 없었다. (<셰이프 오브 워터>도 내겐 그저 그랬기에.) 그래도 호기심에 봤는데, 웬걸. 미장센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미아 고스가 나오네? 그녀가 연기하는 엘리자베스가 왜 프랑켄슈타인에게 그토록 끌리는지 의아했는데(이 부분은 소설 원작과 다른 각색이라고 한다), 영화를 다 보고 프랑켄슈타인을 연기한 배우를 찾아보고 납득을 했다...ㅋ 기괴한 분장을 뚫고 나오는 제이콥 엘로디의 잘생김, 그리고 인간을 압살 하는 피지컬. 역시 로맨스의 개연성은 비주얼에서 오는 거라니까!
러브 어페어 (레오 맥커리, 1957)
각자 약혼자가 있는 니키(캐리 그랜트)와 테리(데보라 카) 크루즈 여행에서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6개월 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미 여러 버전으로 리메이크된, 고전 로맨스의 정석. 다 아는 맛이고 예상 가능한 전개인데도 불구하고 후반부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며칠 전 본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톰 행크스 친구의 아내가 이 영화 줄거리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혼자 또 감동받아 울먹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역시 때로는 가장 뻔한 것이 가장 강력한 감동을 준다.
(그나저나 문요즘은 예전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정석'의 미남 미녀 배우들이 없는 것이 참 신기하다. 물론 한국도 예전만큼 고전적인 미남 미녀 배우들은 잘 안 보이는 것 같고... 시대의 미감이 바뀐 탓일까?)
컨택트 (드니 빌뵈브, 2016)
어느 날 전 세계 12개 지역에 외계 비행 물체(쉘)가 나타난다.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와 과학자 이안(제레미 레너)은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고 소통하기 위해 쉘과 접촉한다.
하도 '컨택트, 컨택트' 하며 호평이 자자하길래 뒤늦게 찾아보았다. 포스터부터 내 취향이 아닌 SF 장르였지만 꾹 참고 봤는데... 아, 정말 재미없었다. 내가 SF에 무지하고 불호하는 성향이라 해도, 이 영화의 개연성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감독의 <듄>처럼 미장센을 보는 맛도 없었다. (외계 비행 물체가 쏘아대는 그 이상한 형상들... 유독 멋없었다... ㅠㅠ) 대체 왜 이 영화가 명작으로 칭송받는지 의문이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동명 영화도 명작이라던데, 이 영화의 여파로 당분간 '컨택트'라는 제목은 피하고 싶어 진다.)
좋은 "지루한" 영화는 많은데, 좋고 "재밌는" 영화가 드물다. 난 후자에 끌린다. 영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그 의도가 얼마나 숭고하든 간에, 일단 "오락"이라는 기능에 좀 더 충실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