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같은 우리네 인생.
최근 “로드무비의 거장“이라 불리는 빔 밴더스 감독의 영화들을 몇 편 봐서, 간략하게 기록해 본다.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1984)
우연히 아래 이미지를 보고 반해서 '반드시 꼭 봐야지!' 했던 영화가 있는데, 바로 <파리, 텍사스>이다.
미리 무슨 내용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보기 시작했는데, 예상과 달리 프랑스 파리와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 주인공은 부모님이 사랑을 나눴던 텍사스에 있는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언급할 뿐이다. 주인공은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살다가 돌아와 동생이 맡아 키워주고 있던 아들과 함께 아내를 찾아 휴스턴으로 떠난다. 초반에 살짝 지루할 법도 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스토리라인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휴스턴에서 일종의 화류계(?) 일을 하는 아내를 찾게 된다. 아내가 일하는 업장에서, 주인공은 수화기로 (여자는 상대를 볼 수 없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건너편 방에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제3자로서의 미소를 띠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흥미롭게 듣던 아내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상대방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남편 시선에서의 이야기를 해줄 때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예전에는 떠나간 그녀를 원망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었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고해성사하듯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아들을 만나달라고 부탁하는 그의 행동이 상당히 용기 있게 느껴졌다. 문득 든 생각인데,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주인공의 깨달음과 사과, 용서를 구하는 장면들을 종종 보기에 우리는 나름 이런 게 당연하고 정상이고 흔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잘 생각해 보면 막상 현실에서는 이럴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것 같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우기고, 상대방의 탓을 하며, 단지 상대가 (잘못이 없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특히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영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작이다.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
너무나도 후기가 좋아 몇 번이고 영화관에서 보려다가 결국 보지 못했던 영화인데, 어느새 넷플에 올라와 어느 햇살 좋았던 주말 오후에 감상. 특이하게도 도쿄 올림픽 홍보를 위해 도쿄의 공중화장실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다가, 빔 밴더스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해서 영화로 제작된 작품이다.
빔 밴더스 특유의 로드무비 느낌과,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함이 같이 공존한다. 주인공이 출퇴근길 드라이브하면서 음악을 듣는 장면들이 특히 좋았다. (빔 밴더스는 음악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다.) 워낙 유명해서 들으면 알지만, 잠시 잊고 있던 올드팝 명곡들이 흘러나와 왠지 모르게 추억여행 하듯 마음이 잔잔해졌다.
올드팝들이 연이어 나오는 와중에 딱 하나 일본곡이 나오는데, 음악이 좋아 아래 추가.
주인공은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도 별로 없다. 대체로 평탄한 일상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니, 소위 요즘 트렌드라는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를 지내고 있는 사람인 거다. 다만 그 한없이 잔잔하던 일상에서 이따금씩 예기치 못한 일들로 약간의 요동치는 감정은 느낀다. 사실 혼자인 게 편하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타의에 의한(?) 타인과의 교류에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외로움과 마주치게 되는 것 같아 약간 슬프기도 했다.
그나저나 대부분은 아마도, 하찮게 생각할 공중화장실 청소를 저렇게 장인정신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라니. 나는 장신정신은커녕 제대로 된 직업정신이나 있는 사람일런지? 다 사람 마음먹기 나름인데, 왜 이렇게 내 일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게 어려운 일인지. 요즘따라 부쩍 내가 하는 일들이 참 별거 아닌,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싶어 의욕이 참 안 서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심정엔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듯하다...) 원래 본업에서 의미를 찾고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정석인데, 자꾸만 딴 길로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아래 빔 밴더스가 "그 누구보다도 네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고 조언해 주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네가 하고 있는 일에서 장인정신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처럼 들리기도 하고... 하, 여하튼 확실한 건 지금 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상태여서 (남들이 보기엔 꽤나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마음속은 알게 모르게 불안과 답답함으로 요동치고 있다는 거다. 아, 내 인생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그냥 또 이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나 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빔 밴더스 감독이 이렇게나 일본 감성을 이해한다는 것에 살짝 놀랐다. 감독 정보 없이 보면 그냥 영락없이 일본 영화라고 생각이 들 것 같다. 젊은 20대 여자가 나이차가 3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주인공에게 갑자기 뽀뽀를 하는 행동이라던지, 주인공이 사모하는 듯한 소요리(?) 식당 여주인의 얼핏 묘한 남자관계 등등... 이게 내가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인에게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한국인인 내 시선으로는 너무나도 어색했던 <패스트 라이브즈> 같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평을 하기가 조심스럽다), 아주 옛날부터 본인 영화에 일본 요소를 포함했던걸 보면 빔 밴더스는 상당히 일본 덕후가 맞는 것 같다. 덕질에서 나오는 디테일은 역시 다르구나, 내심 감탄했다.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 1987)
대략적으로는, 인간 세계를 지켜보던 천사 하나가 한 여자에게 반해 천사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으로 변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천사일 때는 모든 것이 흑백이었다가, 인간이 된 후 모든 장면이 컬러로 바뀌는데, 이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인간으로 변한 천사는 피를 흘리며 다치는 일이 있어도, 어떠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고통이든, 슬픔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 "경험할 수 있다, "라는 사소한 사실에 감사해야 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큰 행복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행복을 주는 건 사실 사소한 것들일 수 있는데.
이 영화도 칸 영화제 수상작이다. 감독상.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 (The Goalie's Anxiety at the Penalty Kick; 1972)
빔 밴더스 감독의 아주 초기작인데, 살짝 난해했다. 살인을 여러 번 하고도 단 한번 잡히질 않고 태평하게 잘 살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던... 약간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뭔지 감이 안 와서 좀 의아했달까. 빔 밴더스 감독이 이 초기작에 대해 얘기하면서 얼핏 "히치콕 마이너스 더 서스펜스"라고 표현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존경했던 감독의 스타일을 따라 하고자 했던 일종의 초기 실험작같은 느낌으로 봐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1999)
이 작품은 영화는 아니고, 쿠바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한 미국의 프로듀서가 잊혀진, 노년의 쿠바의 뮤지션들을 찾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결성하여 앨범을 완성하고 이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 수상도 하고 빌보드 차트 1위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카네기홀에서 연주까지! (아래 카네기홀 연주는 이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나온다.) 이 작품은 이 그룹의 뮤지션들 개개인의 인터뷰와 그들의 연주를 담고 있는데, 음악이 상당히 좋다.
빔 밴더스 작품들을 몇 개 보고 나니, 내 추측이지만, 빔 밴더스는 굉장히 심미주의자일 것 같다. 일단 영화마다 나오는 여자 배우들이 매우 아름답다. (심지어 <퍼펙트 데이즈>에 나오는 일본 여배우들도 예쁘다.) 특히 <파리, 텍사스>의 나스타샤 킨스키는 비주얼 쇼크 그 자체. 처음 본 배우였는데 너무 아름답더라... 스타일링도 어쩜 그렇게 완벽한지.
남자들의 패션도 꽤 멋있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들의 (요즘 유행하는) 롱코트 패션도 멋있고,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의 우비조차 멋들어지더라. (별로 쓸 일도 없겠지만 살 수만 있다면 그 우비 내가 사고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파리, 텍사스> 주인공의 패션도 요즘 트렌드에 맞는 거 아닌가?
아래는 <파리, 텍사스>에서 몇 컷.
개인적으로 느낀 빈 밴더스 작품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상당히 잔잔해서 어떻게 보면 좀 지루할 수도 있다는 거다. (특히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경우 솔직히 막 재밌진 않았다. 음악은 좋았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도 좀 너무 잔잔했고...) 그래서 진짜 "재미"를 목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빔 밴더스의 작품들이 취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반면에 지친 일상에서 힐링을 원한다던가 자극 없는, 마음 따뜻해지는 콘텐츠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취향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70이 훌쩍 넘어서도 요즘 감성의 <퍼펙트 데이즈> 같은 영화를 만들다니. 대단한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