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표현은 마음을 움직인다.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 발췌 읽기

by 문성 Moon song Kim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다가 눈물이 흘렀다.

좋은 글은 우리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표현하고 마음을 움직인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일부를 발췌해 옮긴다.



요점은 이 영화(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쓰네오가 아니라 조제라는 것이고, 쓰네오가 어떤 답을 할 것인가가 서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쓰네오의 대답은 결국 ‘나도 나를 사랑해’가 되고 말았다. 쓰네오가 조제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조제의 결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했어야 했다. 그러나 쓰네오는 실패했다. 예나 지금이나 쓰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는 것이다. 조제의 집을 떠나며 쓰네오가 한발 늦게 오열하는 장면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죄지은 자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통한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죄가 아닌 실패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쓰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가’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였기 때문이다. 조제는 성공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아름다운 힘이다.


혹자는 조제가 장애인이므로 이영화가 사랑의 일반논리학을 입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같은 논리가 <러스트 앤 본>에도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라고 말해야 한다. 이 특수한 상황이 오히려 사랑의 일반논리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장애’라는 요소는 사랑의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결여’의 은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테파니의 다리가 잘리면서 시작되고 알리의 주먹이 살 나면서 끝나는 영화다. 쓰네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알리에게는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 때문에, 쓰네오가 흘린 눈물과는 다른 종류의 눈물을 흘리면서, 알리는 비로소 스테파니에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해.”


쓰네오가 실패한 지점에서 알리는 성공했다. 쓰네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결여를 알리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는 이 발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사랑의 논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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