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몰락의 에티카> 글읽기 마음읽기
그를 보았노라는 간만에 만난 친구의 한 마디에 대답은커녕 생각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우연한 소식에 반사적으로 솟구치는 눈물.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건넨 친구는 당황하며 나를 살피고 나도 황망해져 나도 내 자신에게 놀랐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친구가 깜짝 놀랐다며 웃었다.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들. 감정들. 기억들. 그리고 뒤엉키는 생각들. 꼬이고 뭉친 실타래를 풀듯이 그것들을 풀 수 있을까. 가만히 들여다보고 하나씩 펼치고 가다듬어 다시 곱게 간직해두었다가 누군가 그것을 들춘다면 웃으며 고맙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언어로 다루는 방법-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방법-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방법인지도 역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감각들을. 감정들을. 기억들을. 그리고 생각들을. 언어로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제대로 읽는 것보다 우선하여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방민호, 서정시학)라는 책의 제목을 읽으며 절절히 느꼈었다.
나를 표현하고 싶어 글을 쓰다가 아마도 영영 메꾸지 못할 것만 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을 느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그 간극을 메우고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에 가 닿기를 바라며 또 다시 글을 써나는가 나와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곤 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이 질문은 본래 윤리학의 질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몰락은 하나씩의 질문을 낳고 그 질문과 더불어 새로운 윤리학이 창안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다. 온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이 이런 것이라서 그토록 아껴왔거니와, 시정의 의론들이 아무리 흉흉해도 나는 문학이 어느날 갑자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를 넘어서고자 시도하는 이들의 글은 깊은 위안을 주었다. 나와 같이 느끼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기뻤고 연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목마른 이가 꿀꺽꿀꺽 물을 들이키듯 허겁지겁 읽어내려가다가 글쓴이의 마음과 내 마음이 겹쳐지는 그 순간들을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아 멈추곤 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몰락한 자들에 대해서 쓰는 작가들에게, 몰락한 자들을 쓰는 작가들의 차가운 듯 하지만 더없이 따뜻한 시선에, 차마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기어이 그들에 대해서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내면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가면서까지 애정을 쏟고야 마는 그들의 태도에 매료되곤 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그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응원하는 작가들의 그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결국 텅빈 채로 가득 차 있지만 숭고한 표정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읽으며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 속에서 온기를 그리고 위안을 얻곤 했다. 성공을 좇지 않아 타박을 당하는 내게 손을 내밀고 어루만져주듯 위로하는 것 같아서, 나 역시 그러하다고 자신을 드러내는 그들에게 동지의식를 느끼곤 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타박과 질문 속에서 작가들이 소설 속에 시 속에 담아낸 그들처럼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좌표를 바꾸는 존재가 되어도 나쁘지 않다고 적어도 스스로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질문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여기곤 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뿐 아니라 예술이 그러한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그런 것이라서 그토록 아껴왔었다.
"다음 두 개의 명제를 늘 붙들고 있다. "예술에 열광하는 것은 비평가와는 무관하다. 그의 손 안에서 예술작품은 정신들의 투쟁 속에서 번뜩이는 칼이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람들은 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판단이라든가 이성이라든가 냉안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애정이라든가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고바야시 히데오, <비평에 대해서>) 이 두 명제를 모두 존중한다. 가능하다면 그 둘 모두를 내 글이 감당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후자의 위치에 설 때 더 행복했다. 나에게는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야망이 많지 않다. 나는 차라리 압도적 특수성 혹은 매혹적인 주관성이고 싶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오로지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언제나 비평은 벤야민과 고바야시 히데오 양극의 어느 언저리에서 존재했던 것 같다. 그 둘 속의 긴장과 조화를 제대로 해내는 사람들이야말로 비평가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나 역시 신형철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야망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차라리 압도적 특수성을, 매혹적인 주관성을 택하는 쪽이었다. 물론 나는 등단을 하지도 않았고 전문가로서 발언을 요구받거나 청하는 이도 없었기에 나의 주관성과 나의 비평은 오롯이 나와 내 글을 읽는 이들과 공유를 하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번번히 내가 그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속상하고 한없이 나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지곤 했다. 내 글들이 나의 삶을 덮을 수도 없었거니와 지금도 역시 부족하고 서투른 글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신형철의 입을 빌어 그와 같이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절박하게 말한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정처없음에 작은 지표가 되어왔다. 나는 무수히 많은 감각들과 감정들, 기억들과 생각들 속에서 헤어나오기 위하여 글을 쓴다. 나는 글쓰기를, 미술을, 예술에 대하여 쓰는 것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신형철이 하는 저 고백을 내가 다시 한 번 나의 방식대로 차용하면서 나는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저 말을 쓸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토로하는 그 심정을 떠올린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그를 사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