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변산>
* 글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해주시길
몇 주만에 다시 무비패스로 시사회를 보러갔다. 시사회 티켓은 두장이었지만 평일 저녁 영화를 같이 볼 사람을 구하는 건 매번 쉽지 않았기에 오늘은 애초부터 혼자 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빽빽한 사람들 속에 홀로 두자리를 넉넉히 차지하고 앉는 호사스러움이 나쁘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변산>은 현실적인 장면들을 능청스러운 유머로 넘기며 가볍게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장면들을 즐기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뇌졸중을 전하는 전화통화에서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쓰러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후로는 해피엔딩이 분명한 출연배우들의 영화속과 현실을 오가는 듯 음악에 맞춰 활짝 웃으며 춤을 추는 모습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서는 이들은 대부분 즐거운 표정이었다. 앞뒤로 영화를 보러온 이들이 나누는 연기에 대한 칭찬, 랩에 대한 칭찬, 영화가 재미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다른 이들은 가볍게 영화를 즐겼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홀로 영화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자문했다.
처음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빡센 청춘의 현실을 희망적으로 다루는 이야기인 줄 알고 있었는데 실제 영화를 보면서 사실은 빡센 청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 아들의 고된 현실의 근원에는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으로 그 빡센 청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결국은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래퍼로서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에도 래퍼를 택했고 홍대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래퍼임에도 몇 개의 알바를 돌려가며 일상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고된 삶은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대면한다. 그를 부정하고 싶어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고 그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상황에 결국은 극적인 화해를 하고 자신의 삶과도 화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모두 너무나 무거워 차마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들을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깡패로 살며 가정을 돌보지 않고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조차 다른 여자의 집에 있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고향을 등진 아들은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걸 보며 용서할 수 있는가. 만약 나라면 정말 용서할 수 있을까. 문득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권변호사인 아들이 월남전을 다녀왔고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마지막을 병실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 장면. 아버지는 간성혼수로 혼수 상태에 손이 묶여있음에도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며 월남전에서 불렀던 군가를 부르다 피를 토하고 그 막무가내의 광기어린 모습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간병에 지친 아들과 아들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의 아내의 서늘하고도 신산한 얼굴. 그 얼굴들이 나는 변산에서 눈물이 그렁한 얼굴보다도 훨씬 더 그럴듯하다고, 공감이 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공감할 수 없는 것에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은 다시 반문을 일으켰다.
영화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만 유독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이유인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것일까.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적 경험이 교차하면서 각각의 사람들이 갖는 자신만의 감성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유대감이 생길텐데 그 안에서 공감의 폭과 깊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공감을 과연 제대로 가늠해낼 수 있을까.
새삼 영화가, 예술이 대중에게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변산>은 나에게 공감에 대한 의문을 다시 한번 던지는 영화였다.
여러분은, <변산>의 빡센 청춘에, 아니 사실은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