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무비패스로 본 <잉글랜드이즈마인>
브런치의 무비패스, 영화시사회 초대 메일이 왔고 나는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신청을 했다. 광화문씨네큐브. 평일저녁에 찾아간 영화관에는 영화에 대한 기대로 찬 사람들로 가득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특유의 분위기. 모두들 조용히 기다리고 있지만 들뜸을 감추지 못한 소근거림. 달큰한 냄새와 함께 부스럭대는 먹을 거리들. 종종걸음으로 티켓을 끊고 걸음을 옮기는 움직임까지.
어쩌면 그 짧은 순간의 설렘 때문에 우리는 티켓을 끊고 기다리고 영화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영화가 내 마음에 들지 들지 않을지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설사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 순간들로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찬 기다림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 속에서 맛보는 어떤 만족때문에. 물론 영화를 보고나면 그 만족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영화가 좋았는가 나빴는가에 골몰하고 말겠지만.
문득 영화를 기다리는 그 순간의 기대와 영화를 끝까지 보아야만 판가름할 수 있는 만족감을 생각하다가 그 자체가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바라는 무언가를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시작하지만 그 과정을 지나면서 실제로 경험하고 과정이 끝나고나서야 제대로 판가름할 수 있다. 보지 못한 영화를 기다렸다가 영화가 시작되고 상영관 속에 앉아있어야만 엔딩크레딧과 함께평을 할 수 있듯이.
<잉글랜드이즈마인> 은 굳이 비유하자면, 영화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상영관에 들어가 암전이 되고 다시 불이 꺼지기 전까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스티븐 모리세이, 영국의 걸출한 밴드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천재적 밴드보컬의 화려한 인생이 시작되기 전, 불안, 고독, 기대, 흥분, 좌절, 절망, 다시 기대로 점철된 순간들을 그린다.
인상적인 첫 장면. 세차게 때리는 파도, 하얗게 부서져 다시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장면은, 한치 앞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한없이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서고 싶어하는 젊은이를 보여준다. 앞날을, 진로를, 꿈을, 고민하며 뒤척이던, 여기저기를 정처없이 떠돌던 주인공은 파도를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한없이 여리고 무기력하고 심약하다.
그는 어두운 방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글을 쓰고 그것을 독자기고란에 연재하지만 밴드에 대한 혹독한 비평과는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밴드 멤버를 구하기 위해 구인광고를 내는 것조차 용기가 없어 쩔쩔맨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다가 첫 무대에서 그가 눈을 내리깔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노래를 시작하지만 결국은 떨림과 들뜸과 억눌림과 자유가 뒤범벅이 되어 화면을 가득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래.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은, 원래의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무언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것은, 그 무엇을 아름답게 성취하기 위해 온힘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껍질을 깬다는 것은 저런 모습이었지. 원래의 어리석고 나약하고 쩔쩔매는 그 모습에서 아주 가까스로 한발을 내딛는, 그 내딛음이 스스로도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눈이 커지고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도 동작도 커지며 자유로워지는.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민망해 고개를 돌리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그 모습은 영화가 중반이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고 그리고 그 뒤로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첫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르지만 팀의 기타리스트만이 런던으로 갈 수 있는 티켓을 거머쥐게 되면서 나락에 빠지는 고통을 맛본다. 폐인처럼 집안에 처박혀 있다가 정신과에 가서 약을 타오고 억지로 다른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음악외에 다른 어떤 일도 만족을 줄 수 없고 음악 역시 인정을 받을 수 없기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
그는 다시 파도 앞에서 독백한다.
일상은 견고하게 매일같이 반복되고 그는 직장을 잡지 못하고 음악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글을 쓰고 곡을 만들고 음악을 듣고 그렇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머리를 자르고, 헤드셋을 끼고, 뿔테안경을 쓰고, 자른 머리를 올려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시도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정처없이 흔들리던 불안한 눈동자가 절망적인 우울에서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냉소로 바뀌는 와중에도.
그리고 결국 새로운 밴드를 만들고 새로운 곡을 낼 채비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딱 한번의 공연만으로 1시간 반의 초조함과 불안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것이 마치 나의 것처럼 여겨져서. 예전의 내 모습을 거대한 화면으로 다시 보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박차고 일어나 나와버리고 싶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외면하지 못하고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으로 영화를 내내 보고 있었다.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멀리서 조망하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 묘한 시간이었다.
영화의 제목 <잉글랜드이즈마인>England is mine은 모리세이의 밴드 the Smiths'의 데뷔앨범, "England is mine and it owes me a living."에서 따온 것이다.
어쩌면 모리세이의 데뷔앨범은 그와 같은 젊은이의 삶에 대한 태도의 함축이기도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영화의 제목으로도 적합한 것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에게는) the smiths가 너무나 오래 전의 밴드이고 알려지지 않은 밴드여서 맥락이나 배경으로서의 밴드, 음악, 그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여 인터넷으로 검색을 좀 더 해본 결과, 영국에서 모리세이는 우리나라로 치면 거의 조용필과 같은 사람이었다. 80년대초반 밴드의 정점이자 소위 브릿밴드의 서정적이면서도 씁쓸한 통찰의 매력을 대표하는 원류로 치는 밴드계의 세익스피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였다. (영국에서 그와 관련한 문화서적만 66권이 나와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 상징성과 영향력은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가.)
https://www.goodreads.com/list/show/10547.Morrissey_The_Smiths
그래서 더더욱 아쉬웠다. 영화에 그의 노래가 충분히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움을 덜어보려고 검색해 들어본 그의 노래를 링크걸어 본다.
"this charming man"을 그 젊음을, 그 달콤살벌함을, 그 한없는 막막한 자유로움과 불안을 느껴보시길.
https://www.youtube.com/watch?v=cJRP3LRcUF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