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패스로 본 영화, <인랑>
1.
<인랑>의 총 제작비는 160억원.
노회찬 의원이 받은 돈은 4천만원이었다.
그리고 그 격차 앞에서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렇다. 이 글은 <인랑>의 시사회를 보고 와서 쓰는 <인랑>에 대한 브런치무비패스글이다. 자본주의적 집적의 상징과도 문화예술계에서 일하는 사람임에도 나는 여전히 돈이 되는 곳에만 돈이 집적되는 자본주의의 규모와 그것과는 상관없이 고군분투해야하는 개개인의 격차를 실감할 때마다 그래서 숫자의 차이 앞에서 스러지는 노력과 열정, 헌신들을 확인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거대한 시스템앞의 아주 작은 부속으로 그래도 균열을 내어 보겠다는 노력은 아주 작은 달그락거림과 삐그덕거림으로 잦아들고 결국 나 외에 다른 이들도 그와 같은 부속으로 부서져가는 것만 같아 아찔하고 때때로 구역질이 난다. 자본이 집적되는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를 아우르는 자본주의의 시스템과 그 안에서 무언가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헌신은 그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 다치거나 아프거나 죽어서도 그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던가 하고 돌아보는 것조차 다시 신문기사와 뉴스와 광고라는 자본주의적인 집적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목도해야하는 이 순간.
<인랑>은 한국영화치고는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된 영화이지만 헐리우드 SF액션 영화에 비해서 부족한 제작비에 30kg가 넘는 무게의 의상을 입고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던 에피소드에 끝없이 거대해지는 자본주의적 집적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확인하게 했다. 동시에 김지운감독이 고심끝에 선보였을 거라 짐작되는 줄거리로 통일직전의 혼란한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소위 종북좌파로 몰리는 진보와 기존의 질서를 고수하려는 기득권과 보수세력의 강력한 집단화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의미심장했기에 액션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오락이기보다는 그 깊이를 더욱 잘 담아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주었는데 노회찬의원의 소식과 계엄령준비문건이 시시각각으로 터지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것이 단순히 영화적 미래가 아닌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예언같아서 섬뜩함을 느꼈다.
2.
엊그제 노회찬 의원의 투신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아 외마디를 내뱉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특검이 그에게 돈을 건낸 이들의 증언을 여럿 확보했다며 브리핑하던 얼굴을 티비화면으로 보며 저 정도로 자신만만하다는 건 확증이라는 말인가 못내 찜찜하던 며칠 전이 떠올랐다. 그는 4천만원을 두 차례에 걸쳐 받은 혐의를 받고 있었고 자신의 유서에 어떤 청탁이나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지만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적었다.
뉴스는 무차별적으로 쏟아졌고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포털에 도배된 뉴스들은 핸드폰을 켜도 인터넷을 켜도 어디서든 쏟아졌고 나는 지하철역 광고판의 뉴스배너에서도 버스의 모니터에서도 실시간으로 밀려들어오는 고인에 관련된 텍스트와 사진과 동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경쟁적으로 조문객들을 찍어 클로즈업하는 사진과 영상들을 볼 때마다 나는 클릭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럼에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진과 영상과 소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노회찬 의원과 관련된 소식들이 모든 것들 뒤덮고 있지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인랑과 관련된 뉴스가 핸드폰과 컴퓨터의 뉴스기사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물론 지금 내 글도 기사들과 함께 물량공세의 일부처럼 다른이들의 핸드폰에 뜨게 될지도 모른다. 더 없이 솔직하게 적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미 몇 주전부터 인랑의 포스터를 보았던 게 떠올랐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을 오가던 버스 측면에 붙어있던 두 개 버전의 포스터가 나를 스쳐갔었다.
극렬한 갈등 속에 정부와 기득권, 세력화한 집단들 사이의 긴장과 겉으로는 제대로 읽히지 않는 겹겹이 얽힌 복잡한 사건의 내막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이자 갈등의 폭발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존재로서 인랑. 늑대로 불린 인간병기가 영화의 주인공이고 얼굴을 볼 수 없는 빨간 눈의 겉모습이야말로 인간성을 숨긴 인간병기의 상징임에도 포스터는 그 마스크 속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특기대 훈련소장. 다른 편의 끄나풀이 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와 마찬가지로 첨예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폭발하는 갈등을 감당해야하는 일종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여자.
권력기관으로서의 힘을 잃지 않는 것을 넘어서 권력을 탈취하려고 하는 공안부장과 테러단체의 중간간부로 자신이 사실은 권력기관과의 연관관계에 놓여있음을 알게 되는 여자.
권력기관의 힘에 자신의 힘을 보태 더욱 큰 힘을 얻고자 하는 공안부차장과 견제기관으로서의 자신의 특기대에 헌신하는 특기대의 핵심대원.
그들은 영화속 인물들인 동시에 포스터로 매끈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비주얼 속에 빛나는 배우들이자 관람객들을 매혹해야하는 그리고 얼마전부터 아마 앞으로도 한참 뉴스와 영상을 도배하게 될 스타들이다.
그들의 연기는 영화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다시 포스터와 뉴스, 영상으로 현실에 도배되고 또 새로운 뉴스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청각은 그렇게나 강력하다. 시청각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그 힘으로 새로운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현실을 압도해버리기도 한다.
섬세하게 계산된 조명과 세트, 색감으로 그들의 얼굴과 표정, 몸짓은 더욱 빛을 발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들은 눈을 사로잡는 시각적 쾌감을 줄만 한 것이었고 결국 이 장면들이 사람들을 끄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또 대중을 끌어들이는 힘이 새로운 자장을 만들어내 현실을 압도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그 압도를 고려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강동원과 한효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정우성의 근사한 표정을 화면 가득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근사한 얼굴들 뒤로 한국의 근미래로, 그것도 통일을 가로막는 복잡한 국제 정치상황과 국내 정치상황을 정우성의 목소리로 설명하고 현실이 짙게 반영된 근미래의 풍경에 더욱 눈이 갔다.
지하수로의 어둠 속에 홀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빨강 망토를 입은 소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배다리 헌책방골목 어딘가의 책방을 지키고 있는 소녀의 언니 뒤로 통일에 대한 기대와 반대가 뒤섞인 폐허에 가까운 풍경.
시위대와 테러범들이 뒤섞인 도심의 뒤편에 연기 뒤로 아스라히 보이는 덕지덕지붙은 현수막과 포스터들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스레 걷는 테러범의 폭탄을 전달하는 소녀와 역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스레 뒤를 쫓는 특기대원.
그 풍경들이 근미래의 풍경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풍경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매주 미술관에 이런저런 일을 하러 갈 때마다 마주해온 친박,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의 얼굴들. 선동적인 문구로 쓴 현수막들,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국기마저 등장해 나부끼는 대한문 앞에서 들리는 종북빨갱이들에게 귀결되는 비난과 욕설에 가까운 분노와 증오에 찬 표현들이 저 장면들 위로 겹쳐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쏟아지고 있는 노회찬의원에 대한 기사와 뉴스와 영상들. 그 속에서는 그를 조롱하고 비난해 마지 않았던 이들이 매끈한 정장을 입고 무표정하게 조문을 하는 모습들과 그와 마음을 나눴던 그래서 오열을 하며 조문을 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들뒤로 미친듯이 터지는 플래시의 번쩍거림과 찰칵거리는 소리들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영화 속의 인랑은 저 붉은 눈과 철면피로 가려져 우아하고 세련되게 그려졌지만 사실 영화 속에 묘사된 저 모습이 아니라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사람들의 얼굴이야말로 인랑의 얼굴이라고 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얼굴들로 도배되다 못해 매 순간 쏟아져 넘치는, 탐욕스럽게 훑어내리는 카메라들이야말로 그 카메라 뒤에 있는 얼굴들이야말로 인랑의 얼굴이라고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그 무차별적인 포화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노회찬 의원이 남겼던 4천만원에 대한 부끄러움과 제작비 1억1천만달러의 <공각기동대> 에 비하면 부족한 제작비160억원의 <인랑>사이의 격차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한다.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로 인한 현실 한편에는 영화로 만들어지지도 못할 현실과 그래서 결국 영화처럼 주목받는 현실. 우리는 그 현실들을 목도하고 그 현실들 속을 오가고 또 그 현실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다시 그 현실들을 오간다.
우리는 느끼고 생각하고 또 선택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할 뿐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 부서진 마음들로 만들어온 길을 다시 또 부서진 마음들을 모아 조금씩 이어가는 수밖에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못했고 결국 영화처럼 주목받는 현실을 영화 속의 현실로 잊지 않으려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