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패스로 본 <증인>
1. 오랜만에 시사회에 다녀왔다. 논문을 끝내고 심사를 받고 나서도 몇 주간 논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논문을 끝내고 나면 모든 것이 홀가분하게 끝날 줄 알았다. 깔끔하게 마무리되고 산뜻하게 발을 내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심사가 끝나고 나서도 수정이 기다리고 있었고 수정이 끝나고 나서는 인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준지 사인을 받고 나서는 논문의 제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본을 하고 나서도 인터넷제출과 중앙도서관 제출, 그리고 논문을 받아보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논문을 쓸 때보다도 바쁜 것 같은 하루하루. 내가 도대체 무얼하고 있는 걸까. 지하철에서 덜컹거리며 나도 모르게 자문했다. 나도 모르게 논문을 펼쳐들고 눈에 띄는 오탈자를 체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심히 곁에 앉아 지하철과 함께 덜컹이는 사람들. 넋나간 사람처럼 스쳐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다시금 내려야 하는 역을 체크하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영화 <증인>을 보러가는 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사회가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다가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기억해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을 소화하고 뒤늦게야 시사회장을 찾았다. 티켓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서도 새로운 영화를 본다는 아무런 기대도 흥분도 없었다. 다만 피곤하고 지친 몸뚱이를 어둠속에 묻어두었을 뿐.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고, 정우성은 나와 별 다를 바 없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속에서 피곤에 찌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피곤하고 남루한 그의 일상이 나의 일상과 오버랩되면서 나는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2. 전직 민변 파이터, 현직 잘나가는 로펌의 월급쟁이 변호사.
세종문화회관 앞의 광화문 대로를 건너는 사람들 속에서 파킨슨 병을 앓는 아버지와 입씨름을 하다 결국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사람들 속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 모습. 카메라는 피곤과 짜증이 뒤섞인 그의 얼굴을 비추고 멀어져 사람들 속의 그의 모습을, 하루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한 명임을 보여준다.
변변한 사건을 맡지도 못하고 사건 수도 적어서 같이 일하는 사무장에게 머쓱해하고 미안해하지만 그마저도 어색하고 낯선 사람. 하루의 무게를 버티는 일상의 민낯은 녹록치 않은 순간들의 연속. 가정부로 일하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갇힌 누군가에게도. 자폐아지만 일반학급에서 수업을 받으며 노골적인 따돌림과 비웃음을 견뎌야하는 누군가에게도. 로펌의 이미지세탁을 위해서 대표의 국선 변호를 대신하여 떠맡게 되며 그의 일상은 그들의 일상과 맞물린다. 그들의 일상은, 그들의 삶의 무게는 서로 교차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에게 얽혀들어간다.
변호사와 피고인. 변호사와 증인. 증인과 피고인.
유리창에 둘러싸인 자리에서 만나든, 하교길에 만나든, 동네주민으로 만나든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상대를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상대의 진심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혹은 상대가 진심을 내보인다고 하여도 그 진심을 받아들인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국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 속 그들의 관계들처럼 우리들의 관계 역시 그와 같은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가.
변호사로 마주한 피고인에게 솔직해야함을 재차 이야기하지만 과연 피고인의 결백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모호함속에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하던 피고인은 무료변론에 작은 청포도 사탕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자폐로 증언의 타당성을 의심하며 만난 증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 애쓰지만 대화는 어렵고 진심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게만 보인다. 모호함속에서 함께 컵라면을 먹던 증인은 자신의 파란 젤리에 뻗은 변호사의 손을 때리지만 그 대신 노란 젤리를 건네주며 곁을 내어준다.
그러나, 그렇게 조심스럽게 시작된 관계들은 재판과 증언, 변론과 반론, 얽혀들어가는 소송전개 속에서 흔들리고 휘청대고 금이 간다.
증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검사와 증인의 말이 변호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 고민하는 변호사.
그들은 결국 법정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 증인은 검사의 관점에서, 변호사의 관점에서, 배심원들과 판사의 관점에서 증언과 함께 자신의 삶을, 평가당한다. 자폐아로서, 장애인으로서, 일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사람으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들을, 결국은 자신의 삶을 부정당한다.
증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얼마나 자주 그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 새삼 생각한다. 나의 외양과 흔적들, 혹은 나의 직위나 직책으로 나의 삶을 평가당하는 그런 상황.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들이 일반적인 혹은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당하거나 부정당하거나 심지어 곡해당하여 내몰리고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는 상황. 어쩌면 영화속의 상황은 장애로 인한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결점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놓일 수 있는 일반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 상황 속에서 오해당하고 무시당한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간다.
또 다시 하루를 맞이하고 일상을 지나고 또 다른 선택들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들에 곁에 있는 이들이 건네는 온기에 힘을 얻는다.
영화속 변호사가 자신도 잊은 생일날, 삐뚤빼뚤 이제는 글씨조차 제대로 쓰기 힘든 아버지의 애정어린 편지를 받고 눈물이 그렁해지듯. 증인이 되어야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곁에 앉아 가만히 함께하는 엄마와 같이.
영화 속 증인은 묻는다.
당신은 나를 이용할 것인가. 나의 증언을 이용할 것인가.
그리고 선택을 한다. 설사 상대가 이용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이후의 상황은, 다른 이들의 선택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나간다.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상대를 이용할 것인가.
당신은, 상대가 나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할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