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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 moon song Feb 03. 2019

그가 내게 편지를 한통 보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온 더 무브>, <인섬니악 시티> 책으로 읽는 사랑

1. 

대학원 다니는 동안 내내 부족했던. 논문을 쓰는 동안 미치게 그리웠던 것 두가지. 우선 책을 읽고 싶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 지평을 넓혀주는 시각. 깊은 사유와 아름다운 문장을. 진심을 다해 전해서 가슴에 박히는 단어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다른 책을 들고 있는 것이 초조했고 책을 펴고 있어도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논문이 끝날 때까지는 사실상 그런 책들을 읽지 못했고 그것이 나를 더더욱 메마르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책만큼 고팠던 다른 것. 사람들과의 대화.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하며 나누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혹은 다정하고 위로가 되는. 혹은 영감을 주고 흥분하게 하는. 역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는 게 어려웠고 만나도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가지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렇게 적으며 새삼 깨닫는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따금 이 두가지가 오르가즘보다 더한 오르가즘을 준다고 느낀다. 어떤 책은 그리고 어떤 대화는, 훌륭한 섹스보다 낫다.


2.

논문이 끝나고 나서 멍한 상태로 며칠을 보내고는 가장 먼저 고른 책은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의 책이었다. 글은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나는 미친듯이 빨려들어가면서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을 내용이 줄어드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이 책을 더 읽고 싶은데 더 읽고 싶은데 읽을수록 더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워서. 그렇게 책을 들고 다니며 미친듯이 사람들을 만났다. 오전, 점심, 오후, 저녁, 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근황을 듣고 어떤 걸 생각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듣고 이야기나누고 자극받는 시간. 이상한 비유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사람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일이 있었다. 내가 몰랐던 사람들의 소식, 생각들, 꽤 오래전부터 달라진 관계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영감을 받기도 했고 상처를 입기도 했으며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웃고 울고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올리버 색스는 계속해서 나를 붙잡았고 격려했고 위로를 주었고 영감을 주기도 했다. 나는 기어이 올리버 색스의 책에 나오는 빌 헤이스의 책을 찾았고 빌 헤이스가 쓴 <인섬니악 시티: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를 찾아내 읽어내려갔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글에 나는 빨려들어가면서 한장 한장 줄어드는 것을 슬퍼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관점에서 담백하고 아름답게 문장이 되었다. 나는 올리버 색스의 시선과 빌 헤이스의 시선에서 함께 그들을 읽었다. 지하철 환승통로를 걸어가면서 읽다가도 목이 메이고 결국은 눈물이 쏟아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늘 내가 찾고 있다고 느꼈던 것들, 어떻게 나의 길을 갈 것인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것인가, 어떻게 그 사람과 함께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으로 다가가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것인가, 그들은 담담한 문장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어떻게, 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문장을 읽고 어루만지고 쓰다듬듯이 다시 적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이라 시간이 모자라 우선은 그들의 첫 장면을 적는다. 



*

그가 내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그는 <해부학자>의 교정본을 읽고 마음에 들어 했다. "원래는 추천사를 쓸 생각"이었지만 "몰입하는 바람에 잊고 말았죠"-재치있는 인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직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인 2008년 초였다. ...그리고 한 달 뒤 뉴욕에 가게 되었는데, 올리버의 초대를 받아 방문했다. ...우리는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오후가 지나도록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에게는 글쓰기 이외에도 다른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도 평생 따라다닌 불면증이 있었다. ..나는 그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독신인지 아니면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런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끌렸다는 점은 잘 알 수 있었다. 누군들 그러지 않았으랴. 총명하고, 다정하고, 겸손하고, 잘생겼고, 느닷없이 소년 같은 뜨거운 열정을 폭발하곤 하는 그에게.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



*

2008년 일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안 되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평생을 소심하게 감정을 자제하면서 살아온 나였기에, 우리 사이에 우정과 친밀한 감정이 자라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했던 것 같다. 2009년 12월이 되어서야, 무릎과 척추 수술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통증과 씨름하던 와중에, 비로소 얼마나 깊은 감정이었는지 깨달았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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