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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 moon song May 05. 2021

나는 그를 온마음으로 사모했다.

<온 더 무브>, <인섬니악 시티> 책으로 읽는 사랑


1.

일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조금씩 고통에 무뎌졌다. 고통이 당장의 현실이 되고 나면 의외로 무덤덤한 기본 조건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오히려 당장 코앞에 당면한 일상적인 문제들에 골몰해서 정작 무거운 조건들을 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에 매달리다가 어깨의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아야 했다. 경추 3, 4번이 뒤로 어긋나고 오른쪽 회전근개의 힘줄 두 개에 염증이 진행 중인데 다른 사람들보다 10년은 앞서 보이는 증상이라고 의사가 친절하면서도 냉정하게 설명해주었다. 울컥 화가 났고 치료를 받으며 급한 프로젝트일들을 마무리했다.

그러다 엄마의 증상을 알리는 병원의 연락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엄마의 모습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리곤 했다. 사건 조사 진행과정을 알리는 경찰의 문자에 한없이 가라앉아 내가 감당하고 있는, 앞으로도 감당해야 할 시간들을 떠올리면 아득해지곤 했다. 그런 순간마다 이렇게 가라앉는 걸 택하지 않겠다. 나에게 말한다. 밀려드는 일들 속에 나를 놓아버리지도 않겠다. 나를 다독인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다시 빨래와 청소, 집을 정리하는 지극히 사소한 일들을 소중히 다뤄본다. 새로운 메뉴로 점심 도시락을 만들고 나날이 달라지는 신록 속을 산책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일상으로 돌려오려는 노력을 이어간다. 계속해서 올리버 색스와 빌 헤이스, 내가 사랑하게 된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사랑의 기록으로 다시금 위안을 받는다.


2.

빌 헤이스는 올리버 색스와 일상적인 순간들을 함께하며 자신이 경험했던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올리버가 반드시 일기를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래서 그러기로 한다." 40이 넘은, 이제는 자기의 입지를 가진 작가임에도. 그는 종이 쪼가리나 봉투 뒷면, 냅킨 같은 곳에 메모를 하며 그와의 순간들을, 삶의 일부를, 기록해나갔다.


*

2009. 6.17.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요?" 누군가 물었다.

"뉴욕 뿐입니다." 내가 답했다.

100퍼센트 진실은 아니다.

O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을 불편해한다. 같이 외출했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얼마나 긴장하는지, 그 떨림이 몸으로 느껴진다.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


3.

빌은 자신의 데이트 상대였던 올리버가 파트너임을 밝히는 것은커녕 게이임을 커밍아웃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인다. 그것이 얼마나 큰 무게로 올리버 색스의 삶을 짓눌러왔는지 나는 빌의 묘사에 더해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을 통해 짐작해본다. 빌은 아마도 함께 외출한 그 순간 올리버의 떨림 속에서 그 무게를 직감했으리라. 그 무게에 지푸라기만큼의 무엇도 더하고 싶지 않아 만나는 이는 단지 뉴욕 뿐이라고 답했으리라. 이제는 그 어느 곳보다도 동성애자들에게 관용적인 뉴욕에서.  


*

1951년은 일도 많고 어떤 면에서는 탈도 많은 한 해였다. ...늦여름이면 나는 옥스포드로 갈 예정이었다. 갓 열여덟이 된 내게 아버지가 남자 대 남자로, 아버지 대 아들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여자친구가 많은 것 같지는 않더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여자애들 좋아하지 않니?"

"여자애들 괜찮죠." 나는 대화가 여기서 끝나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혹시 남자애들을 선호하니?" 아버지는 물고 늘어졌다.

"네, 그래요. 하지만 그냥 느낌뿐이에요. 뭔가를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러고는 두려운 마음으로 덧붙였다. "엄마한테는 말씀하지 마세요. 받아들이지 못하실 거에요."

하지만 아버지는 말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격노한 얼굴로 내려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가증스럽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어머니는 그대로 방을 나갔고 며칠 동안 나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1890년대에 태어났고 정통파 유대교 교육을 받았으며, 1950년대 잉글랜드는 동성애를 변태취급할 뿐 아니라 범죄행위로 여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게 잔인하게 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죽어버리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순간 욱했던 것이고,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아마 내게 했던 말을 후회하거나 어쩌면 당신 마음속 내밀한 구석에 친 칸막이 속에 넣어 닫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은 나의 내면에 죄의식으로 주입되어, 거의 평생 나를 따라다니면서 자유와 환희로 가득해야 했을 성적 표현을 억제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4.

반문조차 하지 않는 온전한 받아들임. 빌은 올리버의 존재 자체를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와의 대화, 사고방식, 일상적인 생활을 포함한 삶의 방식까지도 포함한 그의 존재 자체를.


*

O가 마이클 잭슨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 기억난다. "마이클 잭슨이 뭐죠?" 뉴스가 뜬 다음날 O가 묻는데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었다. ...O는 자기가 1955년 이후의 대중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했는데,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대중음악을 알지 못했고, TV에서는 뉴스 이외에는 보는 것이 없었고, 현대 허구장르는 즐기지 않았고, 자신을 포함해서 유명인이나 명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런 태도는 결코 허세가 아니었고 이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시류와 어울리지 않는' 이 느낌은 그를 극도로 수줍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취향, 그의 습관, 그의 방식, 그 전부가 돌이킬 방도 없이 확고부동하게 우리 시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다른 세기에서 온 사람 같아요?" 그는 가끔씩 사무치듯 내게 물었다. "내가 다른 시대에서 온 사람처럼 보여요?"

 "그래요. 그렇게 보여요."

 이것이 내게는 그에게 매료되고 끌리는 부분이었다. 뉴욕에서 맞이한 첫 번째 여름에 다른 사람을 몇 명 만났지만, O와의 데이트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브롱크스에 있는 식물원에서 긴 시간 산책했는데, O는 거기에 있는 양치식물의 모든 종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밤이면 우리는 웨스트빌리지에서 이스트빌리지까지 천천히 걸었다. O는 걷는 내내 들떠서 쉬지 않고 이야기했고, 맥솔리의 올드에일하우스에 도착해서는 맥주와 버거를 먹곤했다.

 나는 O가 누군가와 사귀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게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도 밝힌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의 말로는, 삼십오 년동안 섹스를 하지 않았다나.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람이 오로지 일밖에 모르고, 읽고 쓰고 사고하는, 그렇게 수도승처럼 산다는 것은 경탄이 나오는 동시에 상상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두말할 여지없이,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내가 그냥 O하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사실을. 그 이상의 무언가. 이제껏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였다. 나는 그를 온마음으로 사모했다.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


온전한 받아들임. 각자의 삶 속에서 경험해온 아픔과 슬픔, 한계들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오랜 시간의 냉소와 외로움- 속에서도 혹은 그것들을 딛고서 빌은 올리버를 껴안는다. 도리어 그것이 그가 갖고 있는 특별함으로 그에게 다가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받아들임으로 도리어 그는 오랜 시간 외로웠던 올리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진정 온마음으로 그를 사모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 자체에 나는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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