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엄마와의 일 년을 돌아보며_엄마 그리고 기억의 조각들
1. 오늘은 2019년 1월 26일임에도 2018년 10월 16일을 기념한다.
오늘이 되어서야 그날을, 작년 한 해를 기념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그날과 함께 많은 일들이 있었던 일 년을, 그리고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한 번 더 돌아본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나는 그날 하루,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일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다.
느긋하게 일어나 사우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능숙한 세신사분에게 몸을 맡겼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가을 햇살 쏟아지는 공원을 산책하고 오래된 친구와 만나 저녁이면 줄을 선다는 맛있는 수제버거집 오후의 첫 손님이 되었다. 흥겨운 팝송이 반짝거리는 미국식 테이블과 의자에 미끄러지듯 울려 퍼지고 우리는 맥주와 버거를 들고 몸을 흔들며 키득거렸다. 따뜻한 번과 육즙이 풍부한 패티, 아삭 거리는 야채를 음미하며. 디저트로 마카롱과 진한 커피를 한 잔 하고 친구가 선물한 케이크를 들고 예약해두었던 타이마사지샵으로 갔다. 긴 시간 정성스러운 손길로 마사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생일저녁을 자축하고 대화를 나눴다. 엄마를 꼭 안아주고 자러 들어가는 걸 보고 혼자 집을 나섰다. 예약해둔 쉐어링카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차체에 쿵쿵 울리는게 느껴지게 최대한 크게 틀고 북악스카이웨이 정상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반짝거리는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감사한 사람들에게 인삿말을 녹음해 보내는 것으로 그날을 끝냈다.
그날은 일년 내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헉헉대던 나에게 스스로 준 보상이었다.
박물관업무, 매듭 대표로 예술가교사, 꿈다락프로그램 운영, 대학원, 논문, 미술관 도슨트, 2018년의 숨가빴던 모든 일들을 뒤로 하고 그날 하루는 나를 위해 쓰기로 오래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더랬다. 나열한 일들은 2018년 내내 파도가 밀려들듯 나를 덮쳐왔다. 때때로 순차적으로 때때로 겨를도 없이 한꺼번에.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며 가라앉았다가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숨을 쉬던 나날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로 나는 미친듯이 일을 하다가 멈춰서 고개를 쳐들고 심호흡을 하곤 했다. 숨이 쉬어지질 않아서.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을 어떻게든 보전하려고 심호흡을 하며 내 인생에 이렇게 힘든 순간이 있었던가, 자문하곤 했다.
2. 그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건 엄마였다.
엄마는 작년 초봄, 그러니까 이제 막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 응급실에 실려갔다. 내가 박물관업무를 마치고 동료들과 마지막을 기념하던 날,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 한통. 통화를 눌렀을 때 수화기 너머 엄마가 넘어져 골반뼈가 부러진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며 또 다시 응급실, 그 아비규환 속으로 들어가야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엄마와 서울대학병원의 응급실에서 이박삼일을 악전고투해야 했고 엄마를 맡을 수 있는 전문의가 해외로 장기출장을 갔다는 이유로 트랜스퍼로 서울의료원의 응급실에서도 며칠을 보내야 했다. 모두가 착한 치매라고 입을 모아 말하던 엄마의 상태는 급작스러운 환경변화와 극심한 통증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극도의 불안과 초조는 끝없는 불면으로 결국은 우리도 알아보지 못하는 섬망으로 이어졌다. 아빠와 언니들 그리고 나는 돌아가며 병실을 지키며 두 달을 버텼다. 밤새도록 잠 한숨 자지 못하게 몇 분에 한 번씩 보채고 떼쓰는 엄마를 돌보다 바톤터치를 하고 병원을 나설 때면 모든 게 무감각했다. 일은 어떤 순서로 해야 가장 빠르지, 과제는 언제 하지, 서류는 언제까지더라, 머릿속으로 할일들을 체크하며 기계적으로 다음 일정을 향해 움직이곤 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엄마는 서울의료원 퇴원이 결정되고도 집으로 갈 수 없는 상태였다. 요양병원으로 옮겨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병원에 가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알츠하이머가 악화된 상태였다. 잠시라도 아빠가 곁에 없으면 너무나 불안해 했고 거동도 어려웠다. 오전과 오후 두분의 요양사가 몇 차례나 바뀌고 가을 내 생일이 되었을 즈음에는 그나마 두분 요양사에게 익숙해지고 엄마의 증세가 조금씩 다시 나아지고 있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굴다가도 어느날 어느 순간은 예전의 엄마처럼 아니 예전의 엄마보다도 더 의젓한 엄마가 되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리 문성이, 힘들지, 묻곤 했다.
3.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부터 이미 막내딸인 나에게 의지하곤 하던 유약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주 아팠고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에는 이미 새벽녘의 응급실에는 이골이 난 상태였다. 엄마의 자지러지는 호소에 119를 누르고 증세와 상황을 설명하고 구급대원과 함께 싸늘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리곤 했다. 아직도 눈감으면 선연히 떠오른다.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응급실의 풍경. 새벽이 넘어서도 자동문이 열리고 뛰어드는 응급침대, 피곤에 지친 심드렁한 얼굴의 의사와 간호사들. 예진실 너머 자동문으로 엿보이는 커튼과 병상들. 복도 사이사이마다 빼곡히 채우고 있던 베드들. 베드들에 누운 것으로도 모자라 의자에 늘어져 각자의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 그것이 무수히 응급실을 다니며 보았던 서울대학교 병원의 응급실 풍경이었다.
아직은 메르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 감압병실도, 병실 분리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 매번 새벽에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면 응급실 안의 병상도 응급실 밖의 베드도 구할 수 없어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환자들이 빼곡한 벤치 사이사이의 남은 자리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예진이 끝나고 이어지는 검사들을 눈을 비비며 기다리다보면 결국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시시때때로 아이처럼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호소하곤 했다. 어쩌면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아프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참는 나의 버릇은 엄마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아픔을 호소하는 엄마 곁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쓴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으니까. 아픔때문인지 피곤때문인지 모를 기진맥진한 환자들 속에서 아비규환이라는 말 아니면 어떤 말로 대신할 수 있는가, 자문하곤 했었다. 새벽의 냉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도록 바싹 메마르게 만들던 그 풍경. 그때부터 나는 엄마가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있는 그 모습에 익숙해졌다.
지금도 눈을 감고 서울대학교 병원의 응급실의 구조를 그릴 수 있다. 어떻게하면 가장 빨리 응급실에 도달할 수 있는지도, 한 명 이상의 보호자를 허용하지 않는 응급실에 편법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어디인지도, 지하의 미로같은 복잡한 통로들도, 본관에서 나가 도로를 건너지 않고도 건너편의 교회에 갈 수 있는 지름길도, 본관 일층의 편의점의 김밥이 몇 시에 들어오고 몇 시에 떨어지는지도.
내가 아비규환이라 부르는 응급실과 병동, 병원의 풍경들을 머릿속에 새겨넣게 된 그 시간들은 엄마가 선사한 것이었다. 그 시간들을 엄마와 함께 지나는 동안 엄마는 농담반 진담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환자에 더해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순간순간은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다정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까지 따뜻하고 다정한 순간이 없었기에. 그리고 이제 나는 그런 순간 어린 시절에는 부리지 않았던 어리광을 부린다.
4. 나는 생일에, 그리고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두 번 나만의 의식을 치르곤 한다.
그날을 기점으로 일년을 돌아보며 소중한 순간들과 소중한 이들을 꼽아보고 감사하는 것. 이런 의식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십대 중반어느날 부터였던 것 같다. 다섯 딸의 막내로 자란 나는 한번도 나만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받은 적이 없었다. 10월에 큰 언니, 세째 언니, 나까지 세 명이나 생일이 있었기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축하 자체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학에 와서 사람들과 여러번의 축하자리를 경험하며 그 사실을 알았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축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이들이 축하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축하의 의미를 충분히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축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앞날이 두려웠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일년간 그래도 감사한 일들이 분명 있었다고 감사한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고 그러니 다음 일년도 어떻게든 살아가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차츰 매번 감사한 순간들을 음미하며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감사한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며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알았다. 축하가 갑작스레 내던져진 이 세상에서 버티어가는 작은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생기를 더해준다는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위안이 된다는 것을.
2018년 10월 16일은 특히나 힘들었던 일년을 자축하기 위해 마음먹고 기다린 하루였다.
내 생일의 정점은 케익을 집으로 가져와 엄마와 함께 촛불을 켜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나는 다정한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어서 동영상을 찍었다.
혹시나 싶어 내 나이를 물었다. 엄마는 내가 스물다섯이라고 했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뒤로 전화번호도 주소도 가족들의 생일과 나이도 외곤 했지만 병원에서 돌아오고나서는 그 모든 것이 엄마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종종 내 나이를 묻곤 했다. 엄마는 일년동안 점점 내 나이를 줄였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는 서른 한두살, 서른, 스물여덟, 그리고 마침내 2018년 10월 16일 생일에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80년 생으로 2018년의 생일을 맞은 나.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살고 있는 엄마에게는 여전히 스물다섯이다. 스물다섯 어린 나는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린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고 나면 엄마는 물음조차 잊는다. 다시 묻자 엄마는 답한다. 스무살. 스물둘. 스물다섯. 서른이 넘었다고 말한다. 엄마가 놀랄까봐 서른이 훌쩍 넘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귀찮아서 초를 세 개만 꽂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노래를 불렀다는 걸 까먹고 다시 노래를 불러준다.
동영상을 다시 돌려보며 지난 일년을 돌아본다. 응급실로 시작되었던 일년. 아비규환 속에서 돌아와 이제는 내 나이가 스물다섯이라고 생각하는 엄마. 다시 한 번 지난 일년을, 아비규환을 빠져나온 심정으로 감사한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동의해준 엄마에게 감사한다. 스물다섯이든 서른 아홉이든 축하의 기쁨을 누리고 다시금 일년을 시작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나는 생일 이후로도 계속해서 엄마에게 내 나이를 묻는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가 자꾸만 줄이는 나이에 다시 숫자를 더한다. 그렇게 우리는 2019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