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장. 그날

by 문성 Moon song Kim



1.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하다거나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들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고 시계가 이제 막 6시를 가리키는 걸 확인하고는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다는 사실에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머리를 말리느라 팔이 뻐근할 때까지 드라이기를 들고 있는 동안에도 기대는 점점 부풀었다. 옷장 앞에서 고심한 끝에 그가 사준 치마와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골랐다. 서툰 솜씨 탓에 몇 번이나 화장을 고치고 나자 밥 먹을 시간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러고도 현관에 서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뛰면서도 내 모습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하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기꺼이 만원 지하철에 올라타 사람들과 부대끼며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를 견뎠다. 길고 긴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례를 기다려 마을버스에 오르고 한참을 흔들려 학교에 도착했을 때에는 함께 흔들리던 사람들이 흩어지는 게 아쉽기마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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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지나고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 인문대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 틈만 나면 두리번거리며 아는 얼굴이 없는지 찾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불러댔다. 고작 몇 마디 인사를 나누려고 오가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나는 곳 어디든 사람들로 가득 차 웅성거리는 어수선한 새 학기 풍경이 꼭 축제 같았다.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며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수업이 시작되고는 저녁에 있을 그와의 오붓한 시간을 궁리하느라 수업을 들을 틈이 없었다. 그를 만나면 저녁부터 먹어야겠지. 무얼 먹을까. 그가 좋아하는 생선구이를 먹자고 해야지. 먹자골목 앞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골목 중간에 있는 백반집에 가야겠다. 그다음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산책 삼아 걷자고 할까 아니면 가볍게 한 잔 하자고 할까……. 수업이 하나 끝날 때마다 계획이 하나 늘었다. 아는 이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가도 점심을 먹다가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5시 반 약속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간만의 데이트였다. 드디어 오늘 그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올라오기로 되어 있었다. 단둘이 저녁을 보내기로 한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그가 집에 내려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딱 한 번 그를 만나러 내려갔다. 그 후로 처음이니 근 두 달만이었다. 그도 나도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서로 통화할 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간신히 통화가 돼도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끊어야 하거나 견디지 못하고 곯아떨어지곤 했다. 이따금 채팅에 메일까지 주고받아도 늘 부족하게만 여겨졌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는 일찌감치 싸 둔 가방을 들고 강의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다른 강의실에서도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복도를 지나 건물을 빠져나왔다. 강의실을 나설 때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문 앞까지는 십분 남짓이니 느긋하게 걸어가도 충분했지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빨리 내려가 그를 기다리고 싶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걸음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에는 가슴이 쿵쾅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횡단보도 건너편 약속한 그 자리에 그가 벌써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그가 거기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먼발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부드러운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 늘어선 가게 쇼윈도들도 은은한 주홍빛으로 반짝거리며 석양을 반사하고 어느 가게 스피커에선가 달콤한 팝송이 울려 퍼졌다. 서늘한 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스치고 때마침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드는 그의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싶었다. 모든 게 너무나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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