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1장. 그날

by 문성 Moon song Kim

2.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한달음에 건너가 그의 팔을 잡아끌고 미리 정해둔 식당으로 데려가기에 바빴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주문할 메뉴를 물어보면서도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는 그를 그러려니 했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었다. 의견을 물으면 단답형으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대화를 할 때에도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듣는 쪽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얼마가 지나야 한 마디씩 거들거나 딴죽을 걸기도 하면서 대화에 동참하곤 했다.


주문을 하고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들이며 오늘 들은 수업들이 어땠는지 늘어놓는 내내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과묵한 그라 해도 유난히 말이 없었다. 올라와서 둘러본다던 자취방은 어땠는지 묻자 “글쎄” 한마디로 입을 다물어버릴 뿐이었다. 올라오는 길이 막히진 않았는지, 아르바이트는 잘 마무리했는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물어봐도 묵묵부답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식당 아주머니가 쟁반을 들고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치와 밑반찬 서너 가지 그리고 밥 두 공기가 테이블에 놓이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를 힐끔거렸다.


그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얼른 삼치를 발라내 그의 밥 위에 얹어 놓아도 그는 반응하지 않고 숟가락만 움직였다. 얼굴이 화끈해서 쳐다보고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밥을 한 술 떠 넣을 때마다 누가 먼저 입을 여나 어디 한 번 해볼까 그래도 먼저 말을 거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밥을 다 비울 즈음 그가 먼저 자리를 옮기자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안도가 되기는커녕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해지는 녹두거리.JPG


앞장서서 식당을 나서는 그를 따르면서도 뭐가 잘못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먹자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에 있는 커피숍 앞에서 멈춰서는 그가 의아했다. 그는 한 번도 커피숍에 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커피숍에 가자고 할 때마다 자기가 방에서 커피를 타 줄 테니 자기에게 돈을 달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거절하곤 했었다. 눈앞의 그는 나를 돌아보더니 커피숍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빈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아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불안했다.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무슨 일이 있었나. 그래서 이렇게 말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나한테 화가 난 걸까. 내가 뭘 잘못했나. 나도 모르는 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나. 그럴 만한 게 뭐가 있었나. 아님 피곤한 걸까. 오늘은 쉬고 내일 만나자고 할 걸 그랬나. 그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나 좀 편안하게 해 주라.”

“뭐라고?”


엉겁결에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날 보지 않았다.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헤어지자.”


머릿속에서 공회전이 일었다. 차분한 목소리. 담담한 얼굴이었다. 내려 깐 두 눈도 깍지 낀 손가락 하나하나까지도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뿐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자 그가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나는 레모네이드. 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메뉴를 고르고 힐끗 나를 쳐다봤다.


“아, 어, 그래, 나도.”

“레모네이드 두 잔 주세요.”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그가 낯설었다. 낯설다 못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는 주문을 곤혹스러워했었다. 주문하는 순간이 싫어서 커피숍에 오는 것도 질색했었다. 커피숍만 아니라 어디서든 주문할 일이 생기면 내게 주문을 맡기곤 했었다. 당연하다는 듯 메뉴판을 덮고 종업원에게 건네는 지극히 사소한 동작 하나가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는 언제나 내게 메뉴판을 양보하던 그가 아니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가 쟁반을 들고 나타나 커다란 유리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유리잔에 가득 담긴 얼음 위로 레모네이드가 넘칠 듯 찰랑거렸다. 그는 물끄러미 유리잔을 내려다보다가 새삼 주위를 둘러봤다. 종업원은 주방으로 사라지고 그와 나 그리고 건너편 끝자리의 남녀 네 사람뿐이었다.


“우리 헤어지자. 친구로 지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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