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4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y 문성 Moon song Kim

1.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들만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터널 안이 어둡다 못해 컴컴했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암흑이 블랙홀처럼 보였다. 그가 저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나까지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고개를 처박고 납작 엎드렸다. 솨아아. 희미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무들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우리는 끝난 것이었다. 새삼스레 그가 한 말들이 떠올랐다. 구구절절 옳았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랐다. 자신이 무너지는 게 싫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도 잡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우리 관계는 이미 틀어져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토록 되돌리고 싶던 우리 사이의 무언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보는 나 그리고 내가 보는 그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조차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가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까발려서 보여주고 나서야 그의 진심을 알았다. 결국 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저기요, 괜찮아요?”


누군가 말을 걸었다.


“쓰러졌나 봐,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다른 한 명이 끼어들었다.


“어디 아픈가. 저기 봐, 팔이랑 다리에 피나잖아.”

“다친 거 아닌가.”

“의식은 있나.”


또 다른 목소리들이 수군거렸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일어서야 했다. 여기서 계속 구경거리가 되느니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나았다.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한 발 내딛자 좌우로 비켜서며 길을 터줬다. 절뚝거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흠칫 놀라고 이내 힐끔거렸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인지도 몰랐다. 흙투성이에 핏자국이 말라붙은 상처로 엉망진창이 돼버린 차림새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절뚝절뚝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었다. 눈앞이 흐릿해서 가로등의 주홍빛이 안개에 싸인 것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딛고 있는 땅바닥은 물론이고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을 아리는 통증까지도 아득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다가 헛디뎌 널브러지고도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일어나 걸었다. 기계적으로 집으로 향하고만 있었다.


골목길에 접어들어 우리 집 대문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에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후들거리고 있었다. 집안에 불이 다 꺼지고 현관 앞에 조명등만 켜져 있는 걸 확인한 후 천천히 열쇠를 돌려 대문과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 한 발씩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힘을 쥐어짜 숨죽여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감은 눈이 시렸다. 입이 말라 저절로 벌어지고 숨을 쉴 때마다 목이 아파왔다. 아무리 이불속으로 파고들어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오한에 떨다 아침을 맞았다.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도 눈이 떠지질 않았다. “안 일어나니?” 엄마의 물음에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엄마는 전날 밤처럼 이마를 짚어보더니 결국 병이 났나 보다며 혀를 찼다. 잔소리는커녕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한숨 더 자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


비몽사몽간에 하루가 갔다. 까무룩 잠들었다가 어깨를 흔드는 엄마 손에 눈을 떠 죽을 몇 술 뜨고 다시 잠들었다가 엄마 손에 등 떠밀려 병원을 찾았다. 대기의자에 앉아 진찰을 기다리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엉거주춤 일어섰다. 감기몸살이라는 진단에 처방전을 받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기다리다가도 내 손에 쥐어주는 약봉지에 놀라 돈을 내밀었다. 환한 대낮 풍경이 어젯밤처럼 아득했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속에 누워 눈을 감으니 방금 전에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아득하게 여겨졌다. 나 자신마저 아득해지고 있었다.


밤이 되자 다시 열이 올랐다. 달뜬 몸으로 허우적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지쳐 잠이 들었다. 또다시 밤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열이 치솟았다. 밤마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낮에 일어나 몽롱한 상태로 병원에 가면 의사는 독감에 몸살이니 푹 쉬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앓아누운 내내 그가 어른거렸다. 눈을 뜨면 그가 보였다. 헤어지자 말하고 돌아섰다. 나를 쏘아보며 네가 나를 아는 것 같냐고 소리쳤다. 이제 그만하자고 넌더리를 냈다. 순간순간 그의 모습이 나를 에워쌌다. 눈을 감으면 밀려들어 나를 덮쳤다. 격랑이 돼 나를 휩쓸고 다시 나를 내치며 펄떡였다. 이내 심연이 돼 나를 집어삼켰다. 헤어날 수가 없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가 어른거릴 때마다 그와 헤어지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다시 지나는 것 같았다. 한 순간인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한 나절이 지난 뒤였다. 낮이 밤으로 바뀌었나 싶으면 밤이 다시 낮으로 바뀌어 있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몇십 년이 훌쩍 지나버린 것 같기도 했다. 주어진 시간이 어느샌가 다 흘러가버리고 이제는 뒤죽박죽이 된 기억 속을 헤매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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