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 “일주일이 넘었네요.”
한 마디가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의사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입안을 확인하고 청진기를 들었다. 입을 벌리고 웃옷을 올려 진찰을 받으면서도 내가 진찰실에 앉아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모니터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의사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젯밤에도 열이 나던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는 괜찮게 나오거든요.”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였다. 열이 올랐는지 아니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시고 아픈가요.”
아픈 건지 아닌 건지도 헷갈렸다.
“약을 삼일 치 처방해드릴 테니 한 번 지켜봅시다.”
끝까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진찰실에서 나오자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축하한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안 나오셔도 되겠네요.”
홀가분해야 하는데 떨떠름했다. 꼼짝없이 내몰리고 있었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부서졌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서 주변이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어야 했다. 한낮의 햇살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나를 발가벗기고 있었다.
내일부터 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수업을 듣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와 마주쳐야 했다.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약국 앞까지 가서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대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학교 앞 지하철역에서 나오면서 다시 한번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타고 가면서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길 빌고 있었다. 정문 앞 정류장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뒤에 바싹 붙어 따라 내렸다. 누군가 알아본다 해도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걸었다. 인문대 3층 행정실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학생계 창구에 서자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직원이 나를 올려다보며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서류 작성 및 제출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휴학 절차는 간단했다. 휴학 신청서를 작성하고 지도교수의 도장을 받아 행정실 학생계에 내면 끝이었다.
테이블 서랍에서 휴학 신청서를 뽑아 들었다. 테이블에 놓인 볼펜으로 지시사항을 따라 빈칸을 채웠다. 인적사항을 적고 서명을 한 다음 마지막까지 빈칸으로 남겨둔 휴학 신청 사유란에 휴학 신청서 안내문에 쓰여 있는 작성 예시문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없어 휴학을 신청합니다.” 한 문장이었다.
지도교수 방문은 잠겨 있었다. 조교실로 발길을 돌렸다. 조교 언니는 휴학 신청서를 받아 들자마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책상 서랍을 열고 도장을 꺼냈다. 읽어보지 않고도 정확히 교수 확인란에 도장을 찍어 건네주었다. 학생계 직원도 받아 들자마자 쓱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나는 휴학생이 되었다.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행정실에서 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달음질치다시피 아까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종이 쪼가리 한 장 낸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도 위축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마을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구석자리로 몸을 숨겼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약국으로 향하면서도 괜스레 주변 눈치를 살폈다.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약사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어서 빨리 약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약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는 동시에 내던지듯 신발을 벗고는 이불속으로 뛰어들어 누가 잡아챌까 이불을 움켜쥐었다.
꼭 죄라도 지은 듯했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일탈이었다. 지금까지는 일상을 벗어난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수업을 빼먹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외박을 하는 게 다였다. 그것도 하루 길어도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다음날이 되기도 전에 조바심을 내며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서는 언젠간 이런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막연하게 상상해볼 뿐이었다. 그게 그와 헤어지고 휴학을 하게 되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몸이 자꾸만 이불속으로 움츠러들었다. 누워서 다리를 뻗고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아 있다가도 일어나 서성이다가도 이불속에 웅크리고 마는 날 발견했다. 온종일을 그렇게 보내고 이불속에 웅크린 그대로 잠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는 걸 제외하고는 자리를 보전했다. 배가 고프면 머리맡에 놓인 음식으로 허기를 달랬다. 앓아누운 이후로 줄곧 엄마가 식사를 대신할 거리를 두고 가곤 했다. 아직은 가족 모두 내가 아픈 줄로만 알고 있었다.
사실은 밑도 끝도 없이 솟아나는 그와의 기억을 더듬고만 있었다. 눈을 떴는데 햇살이 눈부시면 화창한 날씨가 좋다고 즐거워하던 그가 떠올랐다. 비 오는 소리가 들리면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게 귀찮다고 투덜거리던 그가 떠올랐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쳐다보다 그가 경멸에 찬 눈으로 쳐다보던 그 얼굴이 바로 이 얼굴이었지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했었지 하고 또 다른 그와의 순간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그와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나는 그 기억을 몇 번이고 더듬고 더듬어가며 줄기차게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쳐 나가떨어지듯 잠들 때까지.
그렇게 더듬고 있노라면 그와의 기억이 내 몸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 같았다. 그와의 기억이 당연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어떻게 일상을 보냈는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했는지, 무얼 고민하고 무얼 바랐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들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들을 기억해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