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어긋남
6. 상황을 정리한 것은 나도 사람들도 아니고 방학이었다. 수업이 하나둘 종강하고 본격적인 방학이 시작되자 술자리에 불러낼 수 있는 인원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미정이도 지혁 오빠도 집에 다녀온다며 고향으로 떠나고 다른 사람들도 학원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종국에는 핸드폰 주소록에 있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전화질 해봐도 학교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집에서 나온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것으로 몇 주간 끈질기게 이어오던 술자리가 끝났다.
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에 취해 있었다. 그나마 깨어 있는 시간도 자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고 싶었다. 덮고 있는 이불처럼, 이불자락 옆에 나뒹구는 물건처럼, 그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처럼, 아예 의식이라는 게 없는 사물처럼.
밤이 되고 엄마 아빠가 방으로 들어가고 언니도 방으로 들어간 다음 집안에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아침에는 아빠와 언니가 출근하고 엄마도 집을 나서고 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혹시라도 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집에 누가 있는 시간을 피해서만 화장실을 쓰고 부엌을 뒤져 배를 채우며 조심했지만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들키고 말았다.
점심 즈음 모두가 나간 걸 확인하고 찬장 앞에 선 채 허겁지겁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우유를 들이켜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무얼 챙기려고 했는지 황급히 현관에 들어서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를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날 내내 틈만 나면 방문을 열고 서서 쯧쯧 혀를 차며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어쩔 수 없이 아침마다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 가는 척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와 거리를 떠돌았다. 걷다가 추위를 견딜 수 없으면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질 무렵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길을 걷고 있어도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어도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게 뭐든 그 자리에 있는 지형지물 정도로 밖에 여겨지질 않았다. 모든 게 제 자리를 갖고 있는데 나 하나만 자리를 갖지 못하고 떠돌고 있었다. 처음 거리에 나섰던 날들과 다를 게 없었다.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사람들에게 도망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순간 그가 떠올랐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다가 잠결에 듣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골목길을 걷다가 맞은편 골목길 모퉁이로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르고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차창 밖을 쳐다보다가 차창 밖 사람들 틈으로 보이던 그의 뒤통수가 떠올랐다. 그와 스치던 순간들을 곱씹고 또 곱씹고 있었다. 어김없이 가슴이 내려앉아 뻐근해지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와의 그 순간들을 다시 겪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술에 취할 수도 정신을 잃을 수도 없으니 오롯이 그대로 겪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처음이었지만 겪어본 것처럼 익숙했다. 감정이 나를 집어삼키는 그러니까 감정의 시작도 끝도 제어하지 못하고 감정이 날뛰는 대로 휩쓸리는 순간을 이미 겪어봤더랬다. 그가 날 보며 환하게 웃던 그 순간에도 그가 날 외면하던 순간처럼 얼어붙어버렸었다. 사랑한다고 나지막이 속삭이던 그 순간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내뱉던 순간처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었다. 예전의 그 감각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와의 첫 순간순간의 감각들도 다르지 않았었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미움이 슬픔으로 되고 슬픔이 애틋함이 되었다가 다시 미움이 되었다. 밉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각각의 감정이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순서를 가릴 새도 없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기는커녕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결국은 하나인지도 몰랐다. 서로 다른 이름을 제하고 나면 그를 향한 마음만이 남을 터였다. 그것이 그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다. 동시에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나고 남남보다 더한 남남이 돼서도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그게 사랑이든 아니든 그에게로 귀결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날 몰두하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여전히 그를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여전히 그게 시간낭비라 해도 상관없었다. 한 학기를 그렇게 보내 놓고도 겨울방학이 남아 있으니 괜찮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영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다음은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