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어긋남
5. 미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처음에는 지혁 오빠나 정수처럼 나에게 가까운 동시에 그에게도 가까운 사람들이 미워졌다. 다음에는 미정이나 지희처럼 그와 일상을 같이하는 사람들도 미워지고 그다음에는 기껏해야 가벼운 인사를 나누거나 강의실 옆자리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게 전부였을 사람들까지도 미워졌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미워졌다.
언제부터인가 내 앞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이야기하다가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어색하게 말을 돌리거나 다른 누군가가 눈짓하고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입을 막았다. 그에게 차이고 휴학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매일같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버리는 나를 배려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껏 내 연애를 알게 모르게 지켜본 선후배였고 친구들이었으니까.
다들 그를 제외하고는 예전과 다름없는 듯이 굴었지만 그를 제외하고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에게도 역시 지금껏 그의 연애를 알게 모르게 지켜본 선후배였고 친구들이었다. 때때로 그들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그의 이름이 아니어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누군가를. 강의실에서 갑론을박하고 점심값을 서로에게 미루고 농구 내기로 신경전을 펼쳤다는 누군가를. 그들 바로 곁에 가까운 어딘가에 있는 그 누군가를.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 속에는 언제나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겉으로는 모른 척 사람들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면서도 속으로는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그의 족적을 쫓고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고 해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의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새로이 알게 된 것들을 더해 퍼즐을 맞추듯 그의 하루를 맞춰보고야 말았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의 일과를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의 이름 바로 앞에서 이야기를 멈춰버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화는 피해망상으로 이어졌다.
일부러 나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그의 이름만 말하지 않을 뿐 그와의 일이라는 걸 뻔히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은연중에 그와의 관계를 과시하고 한편으로는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았다. 상냥한 얼굴들이 위선으로 느껴졌다. 설사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렇게 가볍게 그와의 일을 흘린다는 것 자체가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내 앞에서 이야기하듯 내 뒤에서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했다. 다른 이 들하고는 더 쉽게 떠들어대겠지. 인터넷에 떠도는 가십과 다를 바 없이 여기고 있겠지. 호기심에 들여다보고 자기 일인 양 열을 올리며 왈가왈부하다가도 돌아서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는 말초적인 흥밋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우리를 아는 사람들을 두루 거치며 한 마디씩 더해진 이야기가 나만 폐인이 됐다는 결론으로 내게 돌아왔겠지. 나 혼자 웃음거리가 되고 있겠지.
그들은 이해하고 있을까. 날 이해하고는 있는 것 같냐고 반문하던 그를. 알고는 있을까. 자신들이 자유로이 그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아무리 원해도 다가갈 수 없지만 자신들은 원하지 않아도 다가갈 수 있다는 걸. 그들과 나를 비교해봤자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쓸데없는 짓거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부러웠다.
그의 곁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낯선 사람들조차 부러워 질투가 일었다. 그가 무심히 곁을 내주는 낯선 이들이라도 되고 싶어 하는 내가 미웠다. 질투가 미움이 되고 미움이 다시 분노가 되어 나를 에워쌌다. 자꾸만 조여들었다. 더 높이 더 두껍게.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나를 가두고 있었다.
이제 술자리는 위안을 주지 못했다. 위안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에도 나는 웃지 못했다. 따라 웃는 척 연기도 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사람들을 지켜보며 머릿속으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씨 하나까지 곱씹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괜찮냐고 나를 챙기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술만 들이켰다.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면서 술자리를 떠나지도 못했다. 어울리지도 못하기 때문에 떠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