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풀이

9장. 망상

by 문성 Moon song Kim

2. 오늘이 졸업식이었다는 걸 광고하듯 꽃다발을 들고 정장 차림을 한 사람들로 술집이 북적거렸다. 언뜻 보기에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스로 안쪽 구석자리에 있는 지혁 오빠를 발견했다. 미정이와 지희까지 고작 셋이서 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빈 술병들과 빈 의자들만 남아 있었다. 술자리는 이미 막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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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떠났거나 오지 않을 터였다. 꼿꼿하게 서 있던 몸이 휘청했다. 실망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실망하는 나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지희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황망한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미정이와 지혁 오빠도 나를 돌아봤다.


한눈에도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은 내가 자리에 앉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떠들었다. 지혁 오빠는 군대도 안 갔는데 한 학기만 지나면 졸업이라니 좋은 시절 다 끝났다고 푸념하고 지희는 이제 졸업준비에 취직 준비까지 할 생각을 하니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라고 투덜거렸다. 미정이도 취직을 할지 대학원에 갈지 아직 진로 결정도 못한 자기야말로 걱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렇게 한참을 셋이서 서로 자기가 더 걱정이라며 입씨름하고 있었다.


사람들 목소리가 쿵쾅거리는 음악소리에 묻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의자를 뒤로 빼고 사람들을 쳐다봤다. 머리를 짧게 깎아 파랗게 드러난 지혁 오빠의 목덜미가 양복 재킷에 어울리기보다는 어색했다. 몸에 딱 맞는 정장 투피스를 차려입은 미정이도 제법 짙은 화장을 한 지희의 얼굴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 때문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어색함이 불편함으로 다시 불안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어색한 건 이들이 아니라 나였다. 못 본 사이에 미묘하게 달라진 사람들이 낯설기만 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에겐 졸업 이후 진로는 고사하고 복학도 아직은 까마득히 먼 일이었다. 내일조차 막연하기만 했다. 오늘 밤을 넘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들과 함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을까.


“지난주 토요일에 롯데월드에 갔었는데. 나랑 민혜, 인우, 정수까지 넷이서. 오랜만이라 그런지 재밌더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놀이기구는 몇 개 못 탔지만. 그래서 다들 평일에 한 번 더 오자고 난리였어. 개강하기 전에 다 같이 한 번 가는 거 어때?”


지희의 이야기가 혼자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나를 붙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지희 입에서 나온 그의 이름이 나를 붙잡았다.


“오, 그거 좋은데? 가자 가자!”

“안 그래도 이번 방학에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개강하는 것 같아서 어쩐지 억울했는데, 잘됐다, 가자, 까짓 거!”


지희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날 쳐다봤다. 내가 대답할 차례였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차 싶었는지 힐끗 내 얼굴을 살피는 지혁 오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정이가 말리려는 듯 슬쩍 지희 팔을 잡았다.


“왜들 그래? 연희야, 가자, 갈 거지? 설마 인우 때문에? 에이, 뭐 어때, 인우랑 한참이나 지났잖아. 인우도 괜찮은 것 같던데 뭘. 둘이 헤어졌다고 원수진 것도 아니고 이제 친구지 뭐. 친구로 지내는 거 아니었어? 친구로 지내는 거 맞지? 그치?”


지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동의를 구했다. 미정이와 지혁 오빠를 돌아보며 득의양양하게 웃어 보이는 그 얼굴에 픽 신경질적으로 웃어버렸다.


“그래, 친구로 지내기로 했지.”


그가 생판 남인 사람보다 더한 남이 됐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말을 섞는 건 둘째치고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는 것도 아마 오늘도 내가 오는 걸 알고 이 자리를 피했으리라는 것도 모를 터였다.


“거봐, 친구로 지내기로 했는데 뭐 어때. 같이 놀러도 가고 어울리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편해지고 그러는 거지, 뭐. 가자, 연희야, 갈 거지?”

“하긴 다 같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그럴 때도 됐지. 지금에야 하는 말인데 너 인우랑 헤어졌을 때 진짜 가관이었다. 무슨 세상 다 끝난 얼굴을 하고 앉아서는, 어우, 우리 네 눈치 보느라 죽는 줄 알았어, 인마. 아직까진 좀 어색할지 몰라도 우리가 있잖냐, 신경 쓰지 말고 가자. 금방 또 괜찮아질 거야.”

“그래,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다 같이 한 번 놀아보자, 연희야.”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가는 거다? 가기로 한 거다? 아싸 아아!”


지혁 오빠도 미정이도 잘됐다는 듯 맞장구쳤다. 다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이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사람들 눈에는 지금껏 나 혼자 유난 떠는 것쯤으로 보인 걸까. 나만 태도를 바꾼다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날 피한다는 티 한 번 내지 않은 걸까. 티 내는 것마저 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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