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없는 웃음

9장. 망상

by 문성 Moon so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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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솔직히 털어놓아야 했다. 우리 사이는 당신들 짐작과 다르다고. 나는 당신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쿨한 애가 아니라고. 아직도 그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없다고. 하지만 끝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나도 납득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설사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해도 이해해주리란 믿음도 가지 않았다.


그는 나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데 나라고 그의 이름 하나 그냥 넘기지 못할 건 또 무어냐 싶기도 했다. 사람들 이야기가 어디까지 가는지 들어나 보자 마음먹었다. 그의 근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근데 롯데월드엔 어쩌다 가게 된 거야?”


짐짓 태연한 척 말문을 돌렸다. 사실은 떠보고 있었다.


“아, 그게, 지난 학기에 넷이 같은 조였거든. 교양인데도 조별 과제에 발표에 개인 과제까지 진짜 빡센 수업이라 고생을 많이 했어. 끝나면 자축 차원에서 뒤풀이하자고 약속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보니까 늦어진 거야. 나랑 민혜가 뭐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인우가 롯데월드 아니면 안 간다고 버티더라. 그럼 뭐 가보자 그렇게 된 거지. 처음엔 인우가 놀이공원에 가자고 하는 게 되게 의외였는데, 걔가 좀 무뚝뚝하잖아, 좋다 싫다 말도 별로 없고. 근데 가니까 정말 재미있어하는 거야. 어린애처럼 막 뛰어다니면서. 인우가 그러니까 우리도 신나서 놀게 되더라. 진짜 재미있었어.”

“그래, 인우 걔가 엉뚱한 매력이 있지. 며칠 전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해서는 문을 열어달라는 거야, 집 앞이라고. 깜짝 놀라서 무슨 일 있냐고 들어오라고 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뒷방 늙은이 혼자 처량하게 앞날이나 걱정하고 있을까 봐 왔다나. 양손에 잔뜩 들고 있던 걸 내려놓는데 다 술이야, 술. 그거 몽땅 비울 때까지 잠도 못 자게 하더라니까. 그 녀석 때문에 죽을 뻔했어.”

“오빠가 처량해서 위로하러 간 게 아니라 자기가 혼자 술 마시기 처량해서 간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럼 이 뒷방 늙은이가 이용당한 건가.”

“그래도 착한 일 했네, 오빠 챙겨서 마시고, 그 덕에 둘 다 처량할 겨를도 없었잖아.”


모두가 낄낄댔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다. 느낄 수 있었다. 일부러 그의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뿐이었다. 이들의 일상에 그의 일상이 겹쳐져 있었다. 그의 세계는 내게만 금지된 세계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휘젓고 있었다.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지희가 소주병을 들고 비어 있는 잔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네 개를 다 채우자마자 내가 먼저 잔을 들었다. 다들 신이 나서 잔을 들어 부딪치고 단숨에 술을 넘겼다. 내가 술병을 들었다. 술을 따르는 사이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참, 오빠랑 인우한테 압수한 담배 두 갑 아직 내 가방에 있다. 지난번 설에 집에 안 내려간 사람들 모여서 놀았을 때 내가 뺏었잖아. 이따 가져가.”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 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나와 머리를 맞대고 불을 나눠 붙였다가 서로에게 콜록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더랬다.


“그럼 지금 내놔라. 안 그래도 떨어져서 사러 가려던 참인데 잘됐다. 요즘 담뱃값이 너무 올라서 살 때마다 손이 떨린다. 얼른 이리 내.”

“여기서 피우려고? 비흡연자들 앞에서? 이따 혼자 피워. 지난번에도 담배 안 피우는 사람들 앞에서 피워서 뺏은 거 기억 안 나? 그냥 담배를 끊지 그래. 손 떨리는 것도 담배 때문 아니야?”

“여기서 안 피우면 되잖아. 얼른 내놔. 담배는 기호품인 거, 몰라?”

“오빠도 그렇고 인우도 그렇고 왜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

“내가 뭘, 난 아무것도 아니다, 인우가 더 많이 피우지.”


이런 것에 의존하게 되느니 시작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했었다.


“내가 보기엔 오빠가 더 많이 피우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그러네. 뭘 그렇게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그래. 정 못 믿겠으면 미정이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둘이 요즘 자주 보니까 알 거 아냐. 네가 보기에도 인우가 더 많이 피우지? 안 그러냐, 미정아? 좀 도와주라.”


미정이는 나와 연락 없이 지내는 동안에도 그와 잘 지내고 있었던 걸까.


“글쎄. 인우는 평소엔 안 피우는 것 같던데. 술 마실 때만 피우고. 오빠는 술 안 마셔도 피우잖아.”

“하하, 거봐, 오빠가 더 많이 피우는 거라니까.”

“도와달라니까 이러기냐? 스터디할 때 진짜 안 피웠어? 한 번도? 중간에 나가서 피우고 오지 않던?”


스터디?


“그런 거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오빠도 참. 대학원 준비하려고 만나지 담배 피우는 거 감시하려고 만나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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