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문

9장. 망상

by 문성 Moon song Kim

4. 내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반문이 새어 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미정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지혁 오빠와 지희도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모두가 날 보고 있는데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몰랐어? 얘들 스터디하잖아. 대학원 준비 스터디.”


지희의 짤막한 대답에 미정이가 해명하듯 덧붙였다.


“대학원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여서 준비해보자고 얘기가 돼서, 근데 학기 중엔 다들 바빠서 종강하고 나서야 시작했어. 그랬더니 하겠다고 남은 사람이 인우랑 나밖에 없더라고. 사실 방학 때도 몇 번 못 봤어. 어영부영하다 보니까.”

“그랬구나. 다들 잘 지내고 있구나.”


평정 잃은 목소리로 뇌까리는데 지혁 오빠가 끼어들었다.


“그래, 인마, 다들 너무 잘 지내서 탈이라니까. 너도 지난번에 봤을 때보단 훨씬 나아 보이는구먼. 이제 복학만 하면 되겠네. 자, 자, 원샷이다, 원샷! 김연희의 복학을 위하여, 원샷!”

“원샷!”


지희와 지혁 오빠가 흥에 겨워 원샷을 외쳤다. 잔을 들고 함박웃음으로 기다리는 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내가 잔을 들자 미정이도 잔을 들었다. 부딪히고 비우고 또다시 따르기가 무섭게 부딪히고 비우기를 반복하고 나니 지혁 오빠는 술이 넘치는 것도 모르고 잔을 높이 쳐들고 원샷을 외쳐대고 지희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지혁 오빠를 손가락질하며 깔깔대고 있었다.


눈앞에 사람들을 두고 그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미정이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혁 오빠와 술잔을 기울이며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지희와 나란히 놀이기구에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편하지 않았다면 같이 놀러 갈 수 있었을까.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지 않았다면 한밤중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칠 수 있었을까.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눌 정도로 깊은 사이가 되지 않았다면 의기투합해서 스터디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왜 내게는 한 번도 대학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나와의 앞날을 바라지 않았던 걸까.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얼굴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오늘 이야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와 함께 해왔으리라는 걸 짐작하고도 남았다. 내게는 침묵한 채 자신들만의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는 게 나를 배신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내가 이들과 가깝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다들 나와는 상관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게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또 하나의 내가 날 나무랐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었다. 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었다. 나처럼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 이상 유지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설사 그와의 관계가 나하고보다 다른 누구하고 보다도 가까워졌다 한들 그걸 알아야 할 권리도 화를 낼 권리도 내겐 없었다.


그와의 관계는 나와의 관계와 별개의 것이었다. 휴학을 하고 혼자 흘려보낸 순간들 속에 이들이 없었듯 이들이 그와 함께 쌓아온 순간들 속에 나도 없었다. 다 같이 놀러 가자는 제안을 하면서까지 나를 배려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있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나를 배려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배신감에 떠는 내가 누구보다도 문제였다.

그렇다 해도, 아무리 나를 다그쳐 봐도, 소용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코앞에 있는 이들은, 그의 옆자리에, 나는 다가갈 수 없는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는 게 나를 미치게 했다. 그와 함께했을 순간들을 그와 나눴을 대화까지도 질투하고 있었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나 그의 흔적을 더듬고 있는 내가 비참했다.


쾅 소리와 함께 지희가 벌떡 일어섰다. 인상을 쓰며 입을 막더니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새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국물이 졸아 말라붙은 찌개 냄비와 지저분한 접시들 그리고 빈 술병들과 술잔들이 테이블 위에 널려 있었다. 지혁 오빠는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기대어 졸고 있었고 미정이는 잠자코 손에 쥔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다른 테이블 사람들도 거의 다 사라지고 음악소리도 잦아들고 있었다. 어느새 술집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폐허.jpg


폭발할 것 같던 감정 그대로 얼어붙었다. 술기운을 빌어보기도 전에 술기운이 가시고 말았다. 반쯤 남아 있던 잔을 마저 비우고 다시 술을 따르려는데 미정이가 부드럽게 술병을 빼앗아 내 잔과 자기 잔에 나눠 따랐다.


“같이 마셔.”


다정한 목소리가 거슬렸다. 미정이는 보지 않고 술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우 얘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모르겠더라. 들을 때마다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러다 보니까 얘기가 늦었어……. 지난 학기 중간쯤인가 겁이 덜컥 났어. 다음 학기에 4학년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은 정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 좀 알아보고 공부도 해본 다음에 결정해야겠다 싶었어. 혼자 하긴 부담되고 같이 하면 그래도 낫지 않을까 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는데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인우였어. 자기도 대학원 생각하고 있다고 해보자고 해서. 나한텐 두 사람 다 좋은 친구니까 각각 잘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네 입장에선 섭섭할 수 있겠다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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