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망상
6. 홀 구석 화장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지희가 보였다. 미정이가 말을 더 잇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지희에게 갔다. 정신을 못 차리는 지희를 일으켜 데려 오자 미정이가 자고 있던 지혁 오빠를 깨웠다. 두리번거리며 잠에서 깨어난 지혁 오빠는 “이제 가자” 한 마디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하고 미정이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희를 부축해서 나오는 사이 술값을 계산하고 우리가 계산대 앞에 도착해서 술값을 나누려고 하자 흰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잡을 새도 없이 술집을 나서는 지혁 오빠를 소리쳐 부르자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손을 흔들더니 늘어진 지희와 지희를 부축하고 있는 우리를 남겨두고 총총히 사라졌다.
양쪽에서 지희 팔을 하나씩 붙들고 씨름한 끝에 지희를 자취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누일 때까지도 미정이도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희네 자취방에서 나와서도 말 한마디 없이 컴컴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큰길로 나오자 횡단보도 앞에 빈 택시들이 줄지어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정이가 나를 잡기 전에 제일 앞에 있던 택시에 올라타 문부터 닫았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차창밖에 서 있는 미정이에게 손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택시가 텅 빈 도로 위를 질주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열려 있던 차창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창문을 끝까지 내리자 바람이 택시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몰아쳤다. 바람소리가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그에 대한 분노도 사람들에 대한 질투도 나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도 같이 울부짖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사그라지지 않고 한꺼번에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폴더를 열고 메뉴 목록에서 전체 삭제 메뉴를 찾았다.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확인 버튼을 눌렀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또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확인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떴다. “삭제되었습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모든 게 사라졌다. 전화번호도 통화기록도 사람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들을 저장해두었던 메시지 보관함까지도.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지워버린 전화번호를 다시 알아내고 싶어서 안달하게 된다고 해도 인터넷을 뒤져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해도 알아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번번이 그래 왔듯이 사람들을 만나며 그를 떠올리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들을 질투하고 미워하게 되고 말 것 같았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갖고 있는 애정을 넘어서는 미움으로 괴로워하게 될 바에야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복학하고도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은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핸드폰을 비우는 것뿐이었다.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조그만 기계 하나에 매달리고 있는 내 꼴이 한심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내가 지긋지긋했다.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 위로 떨어졌다. 내가 이렇게 발버둥 치든 말든 그는 이미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가 돼 있었다.
눈물이 흐느낌으로 흐느낌이 통곡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울음소리는 귀가 먹먹하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묻혀 내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앞자리에서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액셀을 밟아대는 택시 운전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