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에 가까운 오기

10장. 본능적 회피

by 문성 Moon so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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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라지 않아도 개강날은 오고야 말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느릿느릿 학교 갈 채비를 하고 사람들로 꽉꽉 찬 지하철을 몇 번이나 그냥 보내고 눈앞에서 문을 닫는 마을버스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마지못해 버스에 타고 나서도 버스가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내려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차창 밖으로 학교 건물들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혔다.


버스가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창 밖 풍경에 현기증이 일었다. 학교 앞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붐비고 있었다. 정문 한참 전부터 꽃다발을 늘어놓은 노점들과 그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인도로도 모자라 차도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거기에 가족과 함께 두리번거리는 앳된 얼굴의 신입생들과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드는 재학생들까지 뒤섞여 거대한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내려 멍하니 서 있다가 인파에 떠밀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채 잎이 돋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을 따라 걸었다. 건물을 하나 지날 때마다 바람이 달려들어 저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봄바람 같지 않은 세찬 바람에 걷고 있던 사람들 모두 걸음을 재촉했다. 나도 서둘러 인문대로 향했다. 내정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을 늦추는데 뒷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도 종종걸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수업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금세 건물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도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텅 빈 복도와 계단을 지나 행정실 서류작성 테이블 앞에 섰다.


테이블 유리 아래 복학 신청서와 휴학 신청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복학 신청서를 꺼내 마지막 칸의 날짜와 서명까지 작성하고 다시 처음부터 훑어보며 테이블에 붙어 있는 작성 안내문과 비교해봤다. 안내문을 끝까지 읽고 작성한 복학 신청서에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옆에 붙은 휴학 신청 안내문을 읽었다.


안내문 중간에 휴학 신청 사유 예시문이 적혀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없어 휴학을 신청합니다.” 지난번에 베껴냈던 바로 그 문장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복학 신청서를 찢었다. 종잇조각들을 테이블 옆에 있는 휴지통에 버리고 휴학 신청서를 꺼내 휴학 신청 사유 예시문을 지난번과 똑같이 그대로 베껴들고는 행정실을 나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도교수 방문 앞에 서서 심호흡까지 해가며 잠재웠건만 방문을 두드리자마자 들어오라는 교수의 목소리에 다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교수가 휴학 신청서를 받아 훑어보는 사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이 심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인 하나만 받으면 그만이었지만 얼른 이 절차를 끝내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왜 휴학을 하는 거지?”

“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교수는 여전히 휴학 신청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보니까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적혀 있는데.”


휴학 신청서를 책상에 내려놓고는 안경 너머로 힐끗 나를 쳐다봤다.


“아, 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좀 가지고 싶어서…….”


어물거리는 나를 찬찬히 훑어봤다.


“생각은 공부를 하면서도 정리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신랄한 말투에 입이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20대엔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고 지나지만 지나고 나면 분명 후회하게 될 텐데. 가급적이면 시간은 낭비하지 않는 게 좋아. 설마 연애에 실패했다든가 뭐 그런 하찮은 이유로 학교까지 쉬어가며 방황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피가 거꾸로 솟았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속내를 들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나를 깔아뭉개면서도 깔아뭉개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듯 태연한 얼굴에 그러는 당신은 20대에 그 따위 하찮은 짓을 저지른 적이 없느냐는 반문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손끝이 떨렸다. 나오지 않는 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것에 연연하느라 정작 제 시기에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건 바보 같은 짓 아닌가.”

“제 자신을 좀 돌아보려고 합니다. 다른 건 다 빼고 제 자신만. 학교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만만하게 들리도록 또박또박 힘을 줘 말했다. 어떻게든 거창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실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이고 있었다. 허세에 가까운 오기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선택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변호하고 싶었다. 기어이 사인을 받아내고 싶었다. 주먹 쥔 손에 땀이 배고 있었다. 교수는 내 말이 끝나고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뭘 하면서 보낼 생각인가?”


두 눈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여행이요. 여행을 갈 계획입니다.”


내 입이 또 한 번 제멋대로 포장했다. 천연덕스럽게 ‘계획’이라는 단어까지 썼지만 질문이 날아오자마자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다. 날아오는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반사 신경이 혀에 붙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를 다음 말을 받아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교수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를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행이라……, 여행 좋지. 많이 보고 듣고 배우는 데는 여행만 한 게 없지. 그래. 그럼 여행 잘 다녀오고 학교로 돌아오면 그때는 공부에 집중하도록.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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