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본능적 회피
3.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건네는 덕담에 대꾸할 말을 잃고 두 눈만 멀뚱거렸다. 교수가 사인을 끝내고 휴학 신청서를 내밀자 뒤늦게 맥이 풀렸다. 별 뜻 없는 대화였다. 내키는 대로 던지는 말에 나 혼자 발끈해서 뻗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잘 다녀오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음 학기에 보자고.”
교수의 눈을 피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다시피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한 층만 내려가면 행정실이었다. 계단을 반 정도 남겨놓고는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행정실 문패가 보였다. 이게 맞는 건지 두려웠다.
교수의 말이 맞는 건지도 몰랐다.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것에 연연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연애에 실패해서 방황하고 있는 게 맞으면서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려고 했던 것만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교수 앞이라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한다 해도, 휴학에 확신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식으로 나를 포장할 필요도 없었다. 휴학을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복학을 감당할 수 없어 휴학을 택했을 뿐이었다.
지난 학기에 휴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상황도 달라졌을까?
가정부터가 불가능했다. 그건 선택의 차원을 넘어선 본능적인 회피였으니까. 선택은 적어도 이후를 가늠해볼 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의 난 눈앞에 닥친 순간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절박하게 숨을 곳을 찾는 상처 입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적어도 숨은 곳에서 나와야 할 시간이라는 건 가늠하고 있었다.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해도 택해야 했다. 나와서 사람들과 부딪히길 택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혼자이길 택할 것인지.
멈춰 있던 자리에서 발을 뗐다.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와 행정실로 들어갔다. 학생계 창구 앞에 서자 예전 그 어느 날처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휴학 신청서를 내고 직원이 훑어보기를 기다리는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 몇 시간처럼 길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가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자 나도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천천히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도 건물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강의실을 지날 때마다 간간이 말소리가 새어 나오긴 했지만 그것 역시 건물의 차분하다 못해 무거운 공기에 잦아들고 있었다.
건물 현관을 나서자마자 크게 숨을 쉬었다. 내 앞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마주치기 전에 내정을 빠져나와 곧바로 후문 쪽 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로 향했다. 제법 가파른 길이라 금세 숨이 턱까지 찼지만 멈추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중턱에 다다라서야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발을 옮기려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덜미를 잡았다.
“누나! 누나!”
“언니! 연희 언니!”
“연희 언니 맞는 것 같은데, 아닌가?”
“연희 누나! 연희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