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본능적 회피
4. 등 뒤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돌아볼 때까지 소리쳐 부를 기세였다. 못 들은 척 그대로 가버리고 싶었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들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게다가 오르막길은 허허벌판이었다. 키 작은 덤불들 뿐 몸을 숨길만 한 나무 한 그루 없었다. 나 말고는 지나치는 사람도 한 명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제일 앞에 서서 나를 부르는 정수 뒤로 손을 흔드는 은별이와 현정이 그 뒤로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또 다른 후배들 속에 그가 끼어 있었다.
“누나, 어디 가요, 잠깐 좀 내려와 봐요.”
정수가 손짓하며 소리쳤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비껴갔다. 그는 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찌푸린 미간과 미세하게 내려앉은 입꼬리.
선 자리에서 인사만 하고 가려던 걸음을 돌려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 정수가 두어 걸음 나와 나를 맞았다. 그와의 거리는 예닐곱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전공수업에서도 안 보이더니 여기서 보네.”
“그래, 다들, 오랜만이야.”
“반가워요, 언니.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그러게. 은별이 예뻐졌네. 간만에 보니까 못 알아보겠다.”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정수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신경은 온통 정수 뒤에 후배들과 서 있는 그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누나, 이번에 수업 뭐 들어요? 시간표 좀 줘 봐요.”
“시간표는 뭐하게.”
“뭐하긴, 괜찮은 수업 있으면 같이 듣게. 빨리 내놔 봐요.”
정수와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정수에게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가 정수와 다른 애들 목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아도, 그가 어떤 말투로 이야기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저절로 그려졌다. 떨어져 서서 다른 곳을 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그 역시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후배들이 그에게 장난을 걸며 시시덕거렸다. 몇 마디가 오가고 그가 뭐라고 했는지 누군가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거짓말”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어허, 정말이라니까”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시치미 떼며 눙쳤다. 무리 속에 킥킥 웃음이 번졌다.
내 안에선 무언가가 요동쳤다. 정수 뒤에 선 그를 보고 울컥 치밀어 올랐다가 나를 외면하는 그의 모습에 거꾸로 처박혔다. 알 듯 모를 듯 나를 의식하는 그의 기척에 다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가 후배들을 놀려대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쳤다. 이 짧은 순간에 그와 헤어지고 지나온 순간들을 한꺼번에 겪고 있었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그가 잦아드는 웃음소리 끝에 말을 돌렸다. “학생회관 가요, 공대식당도 괜찮던데.” 애들도 한 마디씩 보태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를 가운데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고 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들밖에 서서 그들 무리를 지켜보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정수가 팔을 잡아 흔들며 다시 말을 붙였다.
“누나도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우리 밥 먹으러 가던 길이에요. 가면서 얘기해.”
“그냥 갈게.”
“에이 왜요, 같이 가요.”
“아니야. 나 지금 학교에서 나가는 길이야.”
“왜요, 어디 가는데요,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집에 가는 길이었어. 휴학 신청서 냈거든.”
“뭐? 진짜? 무슨 휴학을 또 해요? 졸업 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