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길 위에서
3. 사실상 한국에서 보내던 날들과 다를 바 없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매일이 낯설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에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나마 의지할 것이라곤 가이드북뿐이었지만 그래 봤자 블라디보스톡에 대해서는 달랑 한 쪽짜리 지도와 두어 쪽짜리 설명이 전부였다. 몇 가지 랜드 마크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고는 무용지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이드북을 들고 다니며 거기에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끼적거렸다. 내 감각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민박집에서 나와 왼쪽 길로 내려가면 광장이 나타났다. 날카롭게 번쩍거리며 허공을 응시하는 청동인물상을 지나고 비둘기만 날아다니는 텅 빈 광장도 지나고 나면 항구가 나오고 육중한 선박들이 군함을 처음 보는 나도 한눈에 군함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선박들을 따라 걷다 보면 타오르는 불꽃이 보이고 불꽃 뒤로 잠수함이 버티고 있는 공원이었다. 주변의 건물들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거대한 크기의 고철덩어리를 반 바퀴 돌아 경사진 도로를 끝까지 올라가면 경사의 끝에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에도 역시 무표정한 청동인물상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망대에 서서 지나온 길을 짚어보다가 다시 다른 갈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일과가 되고 있었다.
차츰 도시가 눈에 들어와도 처음 이곳에 내리자마자 밀려들던 위압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시내가 그리 큰 건 아니었지만 시내를 채우고 있는 건물들은 한국에서 봐왔던 것들에 비해 월등히 컸다. 한 블록만 걷고 돌아서도 반대편 끝이 까마득했다. 게다가 블록마다 건물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이어져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벽을 따라 걷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걷다 보면 거대한 건물들이 나를 짓누를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나도 지지 않으려 고개를 쳐들고 그것들을 올려다보았다.
건물들은 대개가 연노랑이나 하늘색 같은 화사한 색으로 페인트칠이 돼 있었지만 군데군데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고 갈라져 낡은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거기에 끝없이 펼쳐진 흐릿한 하늘과 검은색에 가까운 짙푸른 나무들 그리고 청량리나 회기 따위 빛바랜 한국어 표지판을 달고 매연을 뿜어대는 고물버스들까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주 오래된 영화 속에서만 어쩌면 환상 속에서만 보았던 이미지들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데도 아련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 나는 없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나는 있었지만 그 장면 속에 있는 나는 없었다. 그 자리에 있다 해도 그 장면밖에 외따로 서 있을 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섞여 들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눈앞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봐도 그 안에 내 모습은 그려 넣을 수가 없었다. 금발에 창백하다 못해 회색에 가까운 무표정한 얼굴들만 그려 넣을 수 있을 뿐. 나라는 존재를 넣었다가는 어딘가로 튕겨나가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어디에 서도 위압감은 사라지질 않았다.
쫓겨 다니듯 일주일을 보냈을 무렵 그를 봤다. 그와 내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지혁 오빠와 미정이 등 가까운 사람들을 비롯해서 과 사람들이 다 모인 커다란 술자리였다. 그는 태연하게 앉아 그 자리를 즐기면서 때때로 말을 걸고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고 또 모른 척하기도 했다. 시험이라도 하듯 태도를 바꿔가며 나를 대했다.
나를 피하기만 하던 그가 내 옆에 앉아 있다니 꿈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눈길 한 번에 기분이 널뛰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다 못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도 못하고 자리가 파할 것 같아 초조해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뻗는 찰나 꿈에서 깼다. 손에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세수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광장을 지나 항구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를 붙잡지 못해 애가 닳던 그 느낌이 사라지질 않았다. 해무가 밀려드는 부두에 서서 총을 멘 군인들이 작은 배를 타고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자욱한 안개 탓에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이 불쑥불쑥 안갯속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보다 꿈같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보다 훨씬 생생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를 잊은 줄 알았다. 이곳에서 맞이하는 순간순간만으로도 벅차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그는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 무엇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게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안갯속에서 빠져나와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고려인 아주머니를 찾아 기차역을 묻고 가방을 받아 메고는 역으로 향했다. 영어 다음엔 손짓 발짓 그다음엔 가이드북에 나온 지도와 여행회화까지 짚어 보여주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남은 자리를 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저녁에 출발하는 하바롭스크행 티켓을 사고는 가방을 메고 역사 안을 서성이다가 가방을 안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중에는 가방을 베고 누워 기차를 기다렸다.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예닐곱 시간을 견디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침내 안내판에 기차 번호가 뜨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따라 플랫폼으로 들어가 기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