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길 위에서
4. 기차 안은 또 다른 낯선 세계였다.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좌우를 빽빽이 채운 침대들과 탁자들 사이 좁고 긴 통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서운 눈초리의 아주머니와 맞닥뜨렸다. 나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손을 내밀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게 승무원인 듯했다. 티켓을 보여주자 “빠스뽀르뜨” 인상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그녀가 꼼꼼히 내 티켓과 여권을 들여다보는 내내 오가는 사람들도 침대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빼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대충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가이드북에 티켓 읽는 법을 설명해놓은 페이지와 티켓을 비교해가며 침대칸과 침대 번호를 확인했다. 옆에서 짐을 풀던 사람들도 호기심에 찬 얼굴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승무원이 건네준 시트를 받아 주위 사람들이 하는 대로 침대에 깔고 있는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차의 움직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짐을 풀고 탁자에 앉아 노닥거리고 침대와 침대 그리고 객차와 객차 사이를 돌아다녔다. 원래 기차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처럼 편안해 보였다. 몇몇이 내 침대를 기웃대다가 모른 척 시트만 만지작거리는 내게 말을 걸지 못하고 돌아섰다. 또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지 못하게 가이드북을 펼치고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침묵이 사람들과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것보단 침묵을 견디는 게 나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하바롭스크 안내를 읽고 모스크바 기준 시와 비교해서 시차를 계산해보고 시차에 맞게 손목시계를 돌려둔 다음 지금까지의 지출과 남은 돈을 맞춰보고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기차는 이제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한 벌판을 따라 달리고 있었고 기차 안의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할 일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정리하고 가방 속에 남아 있던 빵을 오물거리며 책을 되풀이해서 읽고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거리를 두고 따라내려 어슬렁거리며 만나고 헤어지고 또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들을 지켜보다가 다시 기차에 올라 책을 뒤적거렸다.
해가 완전히 지고 기차 안에도 어둠이 내리자 사람들이 하나둘 침대 속으로 사라지고 대화가 잦아들었다. 모두가 침대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슬그머니 화장실에 가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귓가에는 덜컹거리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덜컹 덜커덩. 덜컹 덜커덩. 규칙적인 리듬이 온몸을 울리고 있었다. 덜컹 덜커덩. 덜컹 덜커덩. 내 몸이 기차의 일부가 돼 달리고 있었다. 덜컹 덜커덩 덜컹 덜커덩. 그대로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잠들었다 깨서 시계를 확인하고 잠들었다 놀라 시계를 확인해보는 사이 아침을 맞았다. 기차는 정확히 기차표에 적힌 모스크바 기준시에 맞춰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그 많은 짐들을 어디에 두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리바리 싸들고 기차가 멈추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잠깐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기차가 멈추는 즉시 기차에서 내려 제 갈 길로 흩어졌다.
나만 기차가 떠나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도 플랫폼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막함도 어깨를 짓누르다 못해 등을 꺾는 가방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다. 일단 숙소를 찾아 가방부터 내려놓아야 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가이드북을 펼쳐 들고 하바롭스크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지도에 표시해둔 가장 싼 호스텔을 찾아 헤맸다. 간신히 그곳에 도착해서도 나는 영어로 호스텔 직원은 러시아어로 진땀을 뺀 끝에 그곳에서 가장 싼 침대를 얻고 가방을 풀고 지친 몸을 누였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일어나 오후에야 숙소에서 나와 길을 나섰다. 지도만 들고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찾아낸 식료품 가게에서 끼니가 될 만한 것을 몇 개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눈을 뜨면 길을 나섰다. 새로이 알게 된 것을 지도에 표시해가며 돌아다니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며칠이 지나서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허기를 참다 참다 식료품 가게에 들러 빵을 고르는데 주인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아는 체하며 눈을 찡긋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빵을 사들고 나와서는 광장과 공원으로 나뉘는 길에 이르러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광장 안쪽 계단에 앉아 탁 트인 광장을 보며 먹을까 아니면 공원으로 가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먹을까 고민하다 멈춰 서고 말았다. 가게 아저씨와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장소까지 고르고 있었다. 이곳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길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쌌다. 기차역으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 노선을 보여주며 시베리아로 향하는 기차 중에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다. 그렇게 울란우데에, 노보시비르스크에, 옴스크에 도착하고 또다시 예카테린부르크로, 카잔으로, 모스크바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츰 여행 자체에 익숙해졌다. 머무르고 떠나는 일에도 요령이 생겼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숙소를 찾는 것부터 거주지 등록까지 너끈히 해냈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그날 눈에 띄었던 장소나 건물을 지도에 체크하고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두었다. 가이드북에 있는 러시아어 회화 예시를 쪽지에 적어 가지고 다니며 먹을 걸 사고 유료화장실을 찾고 기차표를 끊었다. 현지인들처럼 미리 장을 봐서 기차에 오르고 기차가 멈출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그곳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기도 했다. 경찰이 내 침대칸에 찾아와 여권과 초청장을 검사하고 질문을 해도 “야 뚜리스트” 외워둔 문장 하나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며 넘길 만큼 뻔뻔해졌다.
지나온 도시가 늘어날수록 눈이 뜨였다. 도시는 점점 화려해지고 나와 같은 유색인종은 점점 보기가 어려워진다는 걸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비슷했다. 어느 곳이든 도심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광장이나 공원이 나타나고 레닌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꺼지지 않는 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건물들은 화사한 색깔의 페인트로 단장했어도 낡은 티를 없애지 못했고 버스들이나 자동차들은 지독한 매연을 뿜어댔다. 언제나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짙푸른 나무들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생생하면서도 아련한 특유의 모순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기차를 타도 마찬가지였다. 외부는 말끔히 페인트칠해놨어도 내부는 그대로인 낡은 기차간 밖으로 끝없는 하늘과 짙푸른 숲 그리고 초록 들판이 이어지고 이어졌다. 덜컹거리는 기차를 따라 선명하게 넘실거리던 녹음은 기울어지는 햇살 속에 노랗게 바래졌다. 해가 지고 어둠 속에 잠기는 너른 대지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생생하면서도 아련한 분위기가 내 안으로까지 배어들었다. 대지를 지켜보는 나 그런 나를 멀리서 지켜보는 나 둘이 함께 대지를 달리고 있었다.
기차에 앉아 있으면 몇 시간 전까지 있었던 도시에서의 일도 몇 달 아니 몇 년이나 지난 것처럼 가물가물했다. 새로이 펼쳐지는 풍경과 새로이 부대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새로이 부딪혀야 하는 일들이 이전의 것들을 밀어내고 매 순간을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볼 겨를도 없이. 가늘고 길게 늘어지곤 했던 시간을 굵고 짧게 압축해서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에서의 순간들은 기차와 함께 달려 나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코앞에 닥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설사 그게 세수하고 이를 닦는 따위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 해도. 그것 하나를 위해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화장실 앞에 늘어선 줄에 서서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는 듯이 열심히 비누칠하고 물을 끼얹고 칫솔질하다 보면 이전도 이후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전히 그 순간만 지나고 있을 뿐.
이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가 떠오르는 순간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가 떠올라도 그와의 기억을 더듬느라 다른 것들을 내팽개치지도 않았다. 플랫폼을 산책하다가 기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덜컹거리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다가 불쑥 그와 함께한 순간이 겹쳐지고 그의 얼굴이 되살아나도 멈추지 않고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코앞의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하루가 흘러가고 그와의 기억들도 함께 밀려갔다. 정말로 그런 순간들이 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