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노래

11장. 길 위에서

by 문성 Moon song Kim

5.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아직 푸르스름한 플랫폼에 내리자 바로 옆에도 기차가 서 있었다. 서둘러 나를 앞질러가는 사람들을 따라 좁고 긴 플랫폼을 빠져나왔는데 언뜻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차들이 그만큼의 플랫폼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역 내부도 다를 바 없었다. 기다란 양쪽 벽면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매표창구들 앞에 그만큼 많은 줄들이 늘어서 있었다. 또 다른 벽면에는 커다란 전광판에 빨간색 글자들과 숫자들이 깜박이며 발착을 알리고 널따란 홀에는 이제 막 떠나려는 사람들과 이제 막 도착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웅성거리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속에 끼어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간신히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오자 역 앞에도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몇 겹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 뒤로 한눈에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건물들이 역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웅장한 건물들이 이제 막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안에 빵빵거리며 매연을 뿜는 자동차들과 무표정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광활한 도심 한복판에 서 있었다. 지금껏 지나온 그 어느 곳보다도 크고 복잡한 이곳에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지독한 매연에도 코를 막기는커녕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벅차올랐다. 설레고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던 자가용 택시 기사들이 내가 여행객이라는 걸 알아채고 내 주위로 몰려들어 “딱시”를 외쳤다. 가야 할 곳도 없었고 해야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내 마음이었다. “기타이스끼”, “야뽄스끼”, 누군가는 연신 물어대고 누군가는 팔을 잡아당겼다. 그들을 돌아보며 “야 까레이스끼”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까레이스끼”, “까레이스끼”, “까레이스끼”, 나를 부르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기차 안에서 질리도록 가이드북을 읽어둔 터라 모스크바가 얼마나 거대한 도시인지 얼마나 볼 것이 많은지도 잘 알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머릿속으로는 벌써 지도에 표시하던 동선을 떠올리며 오늘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 그 유명하다는 크렘린을 시작으로 붉은 광장, 레닌의 묘, 성 바실리 사원, 박물관과 미술관들, 원형도로를 따라 흩어져 있는 관광지와 광장과 공원들.


일정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나흘이 되도록 이어졌다. 며칠이 지나도 턱없이 부족한 듯했다. 어느 곳이든 마주할 때마다 넋을 잃고 빠져들어 시간을 보내다가 허기를 이기지 못하거나 폐관할 때가 다 되어서야 마지못해 돌아섰다.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욕심이 생겨 가이드북에 나온 곳들을 모조리 섭렵하고도 지도에 달랑 이름만 적혀 있는 곳들까지도 찾아다녔다.


어느새 보이는 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혈안이 돼 있었다. 길을 나서면 지나치는 트롤리버스나 트램에도 시선을 빼앗겨 멈칫거리고 지하철을 타러 내려간 지하철역에서도 역사 안을 감상하다가 지하철을 놓쳤다. 물건을 사러 들어가서는 물건은 사지도 안고 구경만 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해가 길어져 저녁을 훌쩍 넘기고도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지는 긴 하루를 잠시도 쉬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에 몰두한 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와 누워 하루를 돌아볼라치면 떠오르는 건 고작 한두 장면뿐이었다. 그마저도 아스라하게 스쳐가기만 하고 선명히 그려지질 않았다. 무얼 봤는지 꼽아보려 해도 그것조차 제대로 기억나질 않았다.


다시 햇살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감고 있는 눈이 부실 정도였지만 워낙 일찍 해가 뜨니 아직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팔다리가 뻐근하고 몸이 무거워 조금만 더 누워 있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햇살이 쏟아지다 못해 무자비하게 내리 꽂혔다. 얼굴에 닿는 햇살이 따가워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설마 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50분.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열두 시간 넘게 자고 일어난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적어도 여행을 시작하고는 처음인 듯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 생각 없이 숙소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숙소가 있는 골목을 빠져나와 몇 블록을 지나 크렘린 앞에 도착해서 붉은 광장을 따라 돌았다. 느릿느릿 레닌 묘를 지키고 있는 경비대와 꺼지지 않는 불을 지키고 있는 경비대를 지나 다시 크렘린 앞에 섰다. 눈이 아니라 발이 나를 끌고 있었다. 그야말로 발이 닿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점상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근처 커다란 나무 아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건너편에 크렘린과 역사박물관으로 관광객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흩어졌다. 나도 저들처럼 눈앞에 펼쳐진 것에 홀려 휩쓸려 다니다가 이제야 풀려난 듯했다.


햇살 아래는 제법 뜨거웠지만 그늘 아래는 서늘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였다.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벤치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이 가볍게 흔들리고 그늘 속에 조각난 햇살도 함께 흔들렸다.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며 신발에 아른거리는 햇살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풍성한 나뭇잎들 사이사이로 반짝거리는 햇살이 눈을 찔렀다. 크렘린의 붉은 성곽에 둘러싸인 황금색 지붕도 붉은 광장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바실리 사원의 알록달록한 지붕도 아찔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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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음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멜로디가 익숙한 곡이었다. “호두까기 인형.” 혼자 중얼거리며 웃었다. 중학교 몇 학년 때인지 청음 시험을 보겠다는 음악 선생님의 엄포에 억지로 외웠던 게 용케 기억이 났다.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이야기를 멈추고 오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췄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미소를 주고받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그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싶었다.


콧노래가 멈췄다. 머릿속이 하얗게 부서졌다. 그날이 겹쳐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달려갔었다. 헤어지고 돌아와 숨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었다. 내 몸조차 주체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서성이고 몸부림치며 허덕였었다. 언제까지고 그 고통이 계속될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도 바랐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이 낯설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순간들을 까맣게 잊은 채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에게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날카롭던, 매번 베이던, 기어이 나를 난도질하던, 기억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뎌지고 무뎌져 이제는 가만히 앉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녹슬어버리고 만 걸까. 가슴이 저미는 이 느낌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까. 바람이 또 한 번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지고 스쳐갔다. 여전히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경쾌한 왈츠가 춤추듯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변하고 있었다. 그에게 몰두하는 순간은 줄어들고 그로 인한 괴로움도 잦아들고 있었다. 낮의 길이가 늘어나고 여름이 다가오듯. 서서히 그러나 확연히.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변했다는 것에 대한 반발 인지도 몰랐다. 그처럼 변하지 않으리라는 오기 인지도 몰랐다. 결국은 그가 변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가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내뱉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되리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가 짐을 싸들고 나와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기차에 오를 때까지도 입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변하지 않았어, 변하지 않아, 변하지 않을 거야. 되뇌면 되뇔수록 흔하디 흔한 드라마 대사가 되고 있었다. 뻔하디 뻔한 유행가 가사가 되고 있었다. 변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익숙해졌기 때문이야, 그와 헤어지던 그 날만큼 충격받을 일이 없는 것뿐이야, 지금 다시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날과 똑같이 숨죽인 채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을 거야. 알량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합리화하고 있었다.


기차 안에 앉아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할 일을 찾았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차장이 나눠준 시트를 침대에 깔고 짐을 풀고 가이드북을 읽고 차례를 기다려 세수하고 이를 닦고 여행경비를 계산하다가 기차 안의 불이 다 꺼지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나를 흔들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익숙해졌다는 것도 결국은 변화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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