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없는 공허

11장. 길 위에서

by 문성 Moon song Kim

6. 묵을 곳을 구할 수 없었다. 기차가 상트에 도착하기 전부터 가이드북에 있는 상트 지도를 펼쳐놓고 표시해둔 숙소들을 재차 확인해가며 부산을 떨었건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찾아가는 곳마다 방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스트하우스마저 거절당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전 내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돌아다닌 탓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현관에서 나와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가 잡아당긴 듯 몸이 넘어갔다. 벌렁 계단에 드러눕고 말았다. 오른쪽 어깨끈이 가방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가방을 얼싸안고 거리에 섰다.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가방을 땅바닥에 털썩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 날 구경하는 사람들을 나도 구경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도리어 복잡하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있었다.


한숨 돌리고 일어나 근처 인터넷 카페에 찾아가 여행을 준비하며 가입한 웹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뒤졌다. 러시아 날씨를 묻는 글에 상세히 답해주며 상트에 오면 연락하라던 유학생의 답글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무심히 넘겨버렸던 연락처를 가이드북에 옮겨 적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 공중전화 앞에 섰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전화 한 번은 해보고 티켓을 사야겠다 마음먹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방문이 닫히고 혼자 남았다. 가방을 열고 짐을 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통화를 하게 된 것도 사정을 듣고 나를 데리고 와서 방까지 내주는 믿기 힘든 친절도. 앞뒤 없이 냉큼 따라나서 이곳에 앉아 밖에서 식사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며 옷을 꺼내고 있는 나도.


옷을 갈아입고 침대 머리맡 창문 앞에 섰다. 아파트 바로 앞으로 흐르는 네바강과 강 건너 상트의 전경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작고 예쁜 장난감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함께 햇살 속에 반짝거렸다. 달력사진이나 TV 다큐멘터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내가 그런 풍경 속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름은 류경일. 나이는 나보다 네 살 많은 스물여섯. 피아노 전공 유학생활 3년 차. 이제 막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을 떠날까 한국에 들어갈까 고민하던 중이라고 했다. 혼자 밥 먹는 것보단 사람들하고 먹는 게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먹는 게 가장 좋다고 그래서 연락이 온 게 고마울 지경이라고도 했다. 그는 식사하는 내내 먹기보다는 말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꽤나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목소리도 커졌고 그가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나도 따라 웃고 있었다. 같이 들뜨고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가 산책으로 이어지고 산책이 상트의 야경 관광으로 이어지는 사이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걷고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설레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즐거움이라는 게 이런 거였지 새삼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내내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반문도 나를 따라다녔다. 손뼉을 치며 웃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뒀다. 이야기에 맞장구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응하는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내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튿날 아침에도 당연하다는 듯 나를 기다렸다. 상트는 자기가 확실하게 책임지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앞장서는 그의 뒷모습에 괜한 짓을 했구나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데려가는 곳마다 내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내 팔을 잡아끌고 은근슬쩍 말을 놓고 오빠라고 불러보라며 나를 채근했다.


마지못해 따라다니면서도 나란히 걷다가 손이 스치기라도 하면 흠칫 놀라 움츠러들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그가 함께 나가자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혼자 다니겠다는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이유를 대면서도 미안하기보다는 불편한 마음이었다.


여태껏 그래 왔듯 혼자 지도를 들고 걷고 쉬고 다시 걸어 다니며 소개해준 곳들을 돌아보고 새로운 곳들을 찾았다. 옆에 있는 이에게 신경 쓰느라 건성으로 지나친 상트의 모습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모스크바보다 화려하고 섬세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건물들. 사이사이를 조용히 흐르는 운하들. 그것들이 이어져 거대한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도도하게 흐르는 네바 강.


어느 곳에 서든 첫날 창문으로 보던 풍경과 다를 바 없이 눈부시게 빛났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자리에서 계속 지켜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걸음을 옮겨야 했다. 아름다울수록 초조했다. 초조해지다 못해 숨이 막혀왔다. 내가 있으면 안 될 자리인 것만 같아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배회하고 또 배회했다.


영영 지지 않을 것 같던 햇살이 힘을 잃고 늘어지고 반짝이던 강물도 주홍빛으로 변할 즈음이 되어서야 아파트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발을 질질 끌다시피 걸으면서도 곧바로 아파트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지나쳤다. 가능한 멀리 돌아서 가고 있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마지막 다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노을이 꺼질 듯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리에 오르자 양옆으로 넘실대는 검붉은 강물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힘겹게 걸음을 이어가다가 다리 한가운데서 멈추고 말았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발을 떼지 못하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나를 앞질러갔다.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었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앞선 사람이 연신 돌아보며 눈을 맞추고 뒤에 선 사람이 화답하듯 다정하게 웃는 모습을 좇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서도 또 다른 남녀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로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든 말든 서로만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이어지고 이어지는 키스가 열렬했다. 가슴이 저릿했다. 서로를 바라는 마음들이 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였다. 더는 보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발을 옮겼다.


저만치 앞서 가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다리와 다리 건너 건물들의 실루엣과 이어져 하나의 실루엣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풍경의 일부가 돼 있었다. 아무리 걸음을 재촉해도 나는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풍경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강둑도 다리도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주홍색 불빛 아래로 드러났다 사라지고 드러났다 사라졌다. 나는 불빛 아래로 나서지 못하고 다리가 끝나고 강둑이 시작되는 어둠 속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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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옆으로 새카만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난간과 난간 사이가 넓어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바로 강물 속이었다. 섬뜩해서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바라봤다. 강물 위에 떠 있다는 착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물결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물결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래로 아래로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밑바닥이 없었다. 내 아래에는 공허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걸 시공간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 하나뿐이었다. 끝내 나까지도 집어삼켜버리고 말 것 같아 강둑의 난간을 움켜잡았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도망치고 도망쳐 다다른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아무리 도망쳐봤자 결국에는 이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내가 마주해야 하는 이 공허를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다. 누구도 감당해줄 수 없는 이 외로움을 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와의 순간들을 들춰내고 그 순간의 감정들을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것들이 잦아들까 조바심치며 그와 헤어졌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그는 변했을지 몰라도 나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내 존재를 확인하려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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