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음미
1. 공황상태였다. 자고 일어나도 잔 것 같지 않았다. 거리를 걷고 있어도 몸이 움직이고 있을 뿐 누워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상트의 풍경 속을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눈길을 끄는 건 없었다. 지나치는 모든 게 2차원 평면이 되어 뒤로 물러나고 나 혼자 3차원 입체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생각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을 대면 정리가 되기는커녕 더더욱 헝클어지고 말 것 같아 닿을 수 없는 어딘가로 밀어둘 수만 있다면 밀어 두고 싶었다.
딱히 무얼 한다고도 할 수 없고 무얼 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꾸역꾸역 견디다 저녁이 되기도 전에 아파트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의 격자무늬를 바라보며 잠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며 인사를 건넬 때는 데면데면하게 굴던 집주인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겸연쩍어하는가 싶더니 대뜸 핀란드만에 다녀왔는지 물었다. 고개를 젓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곳에 가면 바다 건너가 핀란드라고 상트의 끝이자 러시아의 서쪽 끝이라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현지 여행사를 통해서 핀란드에도 잠깐 다녀올 수 있다고 가보지 않겠냐고도 했다. 계속해서 핀란드만의 경치가 근사하다느니 맛있는 샤슬릭 식당이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흘려듣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방문을 닫고 도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격자무늬를 눈으로 더듬었다. 핀란드만. 러시아의 끝. 저 격자무늬보다도 감흥이 없었다. 설사 핀란드에 간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핀란드 끝까지 아니 지구 끝까지 간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아무리 도망쳐봤자 나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텅 빈 껍데기 같은 이 몸뚱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것뿐이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무늬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핀란드만에 갈 필요가 없다면 여기에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돌아서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돌아서야 할 때인지도 몰랐다.
일어나 짐을 꾸렸다. 나갈 채비를 끝내고 집주인의 방문을 두드리면서 택시를 잡고 기차역에 도착해서 가장 빠른 기차표를 사고 기차에 오르는 것까지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 기대에 찬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가지 않겠다는 말 대신 떠나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비자가 얼마 남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거짓말을 더해 비자 만료 날짜 계산을 잘못하고 있었다고 아무래도 지금 당장 역에 가서 블라디보스톡행 기차표를 사야 할 것 같다고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는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곧 기차표가 남아있을지 모르겠다며 같이 가보자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나를 다독였다.
한사코 사양했는데도 기어이 나를 따라나섰다. 어깨끈이 달랑거리는 가방을 뺏다시피 자기가 들더니 택시를 잡고 유창하게 행선지를 말했다. 기차역에 도착해서는 매표원과 한참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이르쿠츠크행 티켓을 건네주었다. 이르쿠츠크에 가서 하루만 지나면 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자세히 설명해주면서도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는 표를 구하지 못한 것이 자기 잘못인 양 미안해했다.
그의 도움이 늘어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내 가방을 손에서 놓지 않고 전광판을 훑어보며 플랫폼 번호를 찾아내 앞장섰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앞질러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딱 한 번 이곳에 와본 내가 능숙하게 이곳을 휘젓고 다니는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금세 내가 탈 기차를 찾아내 기차 안으로 들어가 침대 번호를 확인하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옆에 서서 어찌할 바 모르는 나에게 별 일 아니라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이렇게 순수하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거절했다는 죄책감에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꾸만 우리를 밀치고 지나가는 통에 우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기차에서 나와 다시 플랫폼에 섰다.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그는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눈을 돌렸는데 우리 주변에는 온통 키스하고 포옹하고 손을 흔드는 사람들뿐이었다. 빨리 인사를 끝내고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출발까지 십여 분이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신세를 많이 져서 어떡하죠?”
“그럼……, 오늘 말고 내일 나랑 같이 떠나는 건 어때?”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이런 말 하게 될 준 몰랐는데……, 좀 더 같이 보내고 싶네. 괜찮다면 잡고 싶어.”
목소리가 안쓰럽다 못해 우스꽝스러울 만큼 떨렸다.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같이 떠나는 거, 어때?”
거절해야 했다. 원하지 않으니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채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하고 굳어버린 얼굴. 계속 쳐다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다.
“여기에서도 폐만 끼쳤는데 계속 폐를 끼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아니야, 폐는 무슨, 폐가 된 건 아니었는데.”
그가 당황하며 말을 받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남은 여행 잘하고.”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웠어요. 잊지 못할 거예요. 유학생활도 잘하시고요.”
뻔한 덕담으로 악수를 끝내고 어색한 미소로 또 한 번 인사를 나눴다. 기차로 들어와 침대에 앉아 가방을 열었
다. 아까 급하게 쑤셔 넣은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꺼내서 정리하고 있는데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플랫폼을 떠난 줄 알았던 그가 차창 밖에 서 있었다.
창문에 다가서자 그가 씩 웃어 보였다. 나도 따라 웃어 보이는데 덜커덩 기차가 흔들렸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기차를 따라오며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멀어지는데도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마침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그는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