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객실 통로의 불이 일시에 꺼졌다. 통로를 서성이던 사람들도 테이블에 앉아 노닥거리던 사람들도 침대로 들어가고 침대마다 붙은 작은 등이 곳곳에서 희미한 빛을 뿜었다. 진작부터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등불도 모두 꺼지고 객실 전체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나서도 눈을 뜨고 있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객실을 울리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자보려고 눈을 감으면 덜컹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까 본 눈물이 잊어지질 않았다. 그는 왜 울었을까. 설마 내 거절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펐던 걸까. 아니면 키스와 포옹으로 이별하는 다른 이들에게 동화되어 감정이 복받쳤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와 헤어져야 한다는 게 결국은 혼자 남겨진다는 게 서러웠던 걸까. 무엇 때문이든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에 무방비 상태로 나를 보던 그 얼굴도. 그는 내 거절에 아파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미안했다. 그가 아파하는 게 미안했다. 그는 아파하는데 나는 아프지 않다는 게 미안했다. 아파하는 그를 앞에 두고도 조금 있으면 헤어지리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내가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며칠을 그와 함께 보냈다고 해서 그의 감정까지 함께할 수는 없었다. 그가 아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하는 것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폐를 끼칠 수 없다는 변명도 유학생활 잘하라는 인사도 하나마나한 아니하지 않느니만 못한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창밖에서 손을 흔드는 그를 보고도 같이 손을 흔들어주기는커녕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는 내 모습이 끝까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인우도, 이랬을까.
강렬한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손목시계부터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5시를 가리키기도 전이었다. 아직 새벽이었다. 시트를 잡아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부셔서 견딜 수 없었다. 달리는 기차 이층 침대 구석자리에서도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서 꾸물대는 사이 사람들이 일어나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했다.
침대를 정리하고 화장실에 다녀와 가방을 뒤적이고 먹을 것을 꺼내 우물거리는 내내 호기심 어린 눈초리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기차 안에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뿐인 듯했다. 눈이 마주치길 기다리듯 노골적으로 고개를 빼고 쳐다보는 이들을 보고도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가이드북을 펼쳐 들고 몇 분을 보내고 나자 사람들은 나에게 흥미를 잃었다. 음식을 먹고 책을 읽고 퍼즐을 맞추고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을 이제는 내가 곁눈질해가며 훔쳐보고 있었다. 다들 자기 집 거실에 있는 것처럼 느긋하고 편안하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눈이 부셨다. 다닥다닥 붙은 침대와 테이블 사이로 조각난 햇살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흔들리며 눈을 찔렀다. 창밖에는 햇살을 가릴 만한 무엇도 없었다. 아스라한 지평선 끝까지 온통 연녹색 수풀뿐이었다. 점점이 박힌 빨갛고 노란 들꽃들만 빼면 바다와 다를 게 없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드넓은 대지에 간혹 구름이 제 모양 그대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객실 안을 둘러봤다. 바로 옆자리 사람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던 말소리가 귓가에 밀려들었다. 낮고 빠르게 쏟아지는 러시아어가 낯설었다. 이 순간 이 자리에 혼자 이방인이 되어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알 수도 없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억센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러시아어의 독특한 발음이 덜컹거리는 기차소리와 어우러져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다시 어젯밤 생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인우도 그랬을까. 그도 나를 보며 그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곁에 있다는 게 불편했을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떠나고 싶었을까. 미안하기만 할 뿐 다른 감정은 없었을까. 이제야 그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걸까. 지금껏 단 한 번도 그의 입장에 서보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발버둥 쳐도 그의 마음을 엿볼 수조차 없었던 걸까.
정말로 그의 마음이 어제 그 사람과 헤어질 때의 내 마음 같았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이상은 함께할 마음이 없었던 거라면 그를 붙잡아둘 수 있었다 해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곁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를 지켜보며 상처 받고 괴로워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리라. 그가 미안하다고 운을 뗐던 그 순간, 미안하긴 하지만 아프진 않았던 거라면, 미안하긴 하지만 헤어지리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의 마음도 그랬던 거라면, 그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었다. 애초부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행히 마음이 맞았다가 어긋난 것뿐이었다. 그의 마음이 변했다 해서 어떻게 변할 수 있냐고 화를 낼 권리도 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나에겐 없었다. 그건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가 변하고 만 그의 마음을 헤어지는 것으로 감당했듯이 나는 변하지 않는 내 마음을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감당해야 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그를 탓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등을 돌렸다 해도, 그의 등 뒤에서 엎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해도, 상처에 허덕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해도, 그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들 모두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는 가해자가 아니었다. 그를 가해자라 한다면 나도 역시 그에게 가해자라 해야 했다. 억지로 붙들고 매달리며 내 마음을 강요하고 받아주지 않는 그를 못내 미워하며 괴롭히고 있었던 게다. 어제 그이처럼 웃으며 보내주지는 못할망정.
하염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으로 내려앉더니 뉘엿뉘엿하다가 사라지고 곧이어 지평선이 흐릿하게 스러졌다. 대지도 하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노란 알전구 아래 고개를 숙이고 침대 시트를 매만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차창에 반사되어 흔들렸다. 침대에 누워 통로의 불이 꺼지고 한참이 지나 침대의 등불들까지도 꺼지는 걸 지켜봤다. 어제도 늦게까지 뒤척인 터라 온몸이 찌뿌드드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강약 중강 약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맞춰 침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변한 것은. 그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헤아려보지도 못했다.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만 했더라도 지금과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이르게 만든 건 바로 나인지도 몰랐다.
그래. 몰랐다.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짐작해봤자 나만의 추측이었다.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그가 왜 변했는지 혼자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가 꺼내어 보여주지 않는 한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심정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는지 돌아서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제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우리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다는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와 헤어지던 그 순간.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따뜻하고 부드럽던 손바닥, 사람들 속에 멀어지던 뒷모습까지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대로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 몸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굳어있던 그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그를 보며 가슴이 저릿했던 건 그를 보는 게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는 그이보다 훨씬 구차했었다.
여전히 그가 미웠다. 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벽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해가 뜰 터였다. 뻔히 알면서도 잠들지 못했다. 다시 복도 쪽으로 돌아누웠다. 여전히 기차가 덜컹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등 뒤에 그가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