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음미
3. 눈을 뜨자마자 아연실색했다. 어둠 속에 혼자 누워 있었다. 덜컹거리는 기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변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어야 할 침대들도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바닥에 있는 가방에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 새로운 숙소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손목시계가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르쿠츠크 현지 시간에 맞춰 바늘을 돌려뒀으니 지금은 분명 새벽이었다. 어제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인다고 누워서는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난 셈이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높은 천장에 하얀 회벽 그리고 나무판자가 깔린 마룻바닥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창밖이 어렴풋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방안은 아직 어두웠다. 그래도 불을 켜긴 싫었다. 모든 게 깊이 잠들어 있는 이 순간을 조금 더 맛보고 싶었다.
역에 내렸을 때에도 이런 기분이었다. 기차가 떠나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다 역사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플랫폼에 남아 있었다. 2박 3일을 내리 기차에만 있다가 땅을 밟자 계속 기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어지러워 발을 떼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는데 눈앞에 안개가 피어올랐다. 플랫폼 너머 허름한 역사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짙고 울창한 숲이 순식간에 안개에 휩싸여 모습을 숨겼다. 안개가 옅어지고 끝내는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면서 안갯속에 모든 것이 침묵하고 있는 그 순간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으면 바라고 있었다.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느릿느릿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시내는 지금껏 다녀본 도시들 중에서 가장 작았고 거리에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인적도 드물었다. 공원이나 광장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도 역시 고개를 치켜들어야만 끝이 보이는 높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꼭 도시 전체가 외부와 고립되어 있는 듯했다.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페인트칠을 해놓은 건물들이 전통문양으로 장식한 목조건물들로 바뀌었다. 대부분이 원래 색깔을 잃어버리고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비바람에 시달려서 그런지 볼품없이 바래져 있었다. 그것들을 비추는 햇살마저 바랜 듯 희미하게 빛났다. 도시를 걷고 있는 게 아니라 도시가 겪어온 시간을 걷고 있었다.
지나치는 건물마다 새겨진 문양을 눈으로 더듬다 보니 인가가 끝나고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앞에 서서 망설이는데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오솔길로 들어갔다. 금세 나무들에 가려져 감쪽같이 보이질 않았다. 나도 나무들 사이로 발을 들여놓았다. 겹겹이 선 나무들 때문에 땅에는 햇살 한 조각 닿지 않았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언제부터 쌓여 있었는지 모를 낙엽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래도 얼굴 보니 반갑네.” 그가 말했었다. 그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려 배시시 웃음이 나왔었다. 광주터미널 대합실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었다. 그를 보러 내려왔다가 몇 시간 같이 보내지도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었다. 그게 헤어지기 전 마지막 만남이었더랬다.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꼭 안아주고 돌아섰었다. 그의 어깨를 훌쩍 넘는 커다란 배낭을 원망스레 노려봤었다. 버스에 앉아 손을 흔드는 그를 끝끝내 모른 척했었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여름방학을 내려가서 보내겠다는 그가 괘씸해서 분이 풀리질 않았었다. 헤어지기 이전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되짚은 순간들을 또다시 되짚고 있었다.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또다시 툭탁거렸었다. 우리는 지겹도록 함께였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그때 그 순간들이 얼마나 반짝이는 순간들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눈물이 들어차기 전에 눈을 꼭 감았다 떴다. 툭탁거리다가도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순간을 누린다는 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오솔길이 좁아지다가 숲에서 나와 강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숲을 끼고 흘러가는 강을 따라 계속 걸었다. 잔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순간을 음미할 수는 있어도 움켜쥘 수는 없었다. 저 물결처럼. 한 순간 생생하다가도 희미해져 흘러가고 있었다. 어지럽게 돋아난 수풀을 헤치고 강기슭에 섰다.
지금껏 그를 놓지 않았던 게 아니라 놓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작 그를 놓치고는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만들어낸 그의 허상에 매달리고 있었다. 흘러가버린 순간들을 어떻게든 움켜쥐어보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끊임없이 곱씹고 곱씹어 기억해내는 것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놓을 수 없다고 변명해가며 헤어날 수 없는 불행에 빠진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즐기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솔길을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게 말을 걸 틈을 주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지나쳐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도 쉬지 않고 숲을 지나고 시내를 거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는 침대 위에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몸을 뉘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서서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와의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희미해지기를 기다리느니 지워버리고 싶었다. 마음대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언제부터 지우는 게 좋을까? 그와 헤어지던 순간부터? 아니면 가장 행복하던 순간부터? 아니면 아예 처음 만난 순간부터? 모두 지워버리고 나면 괜찮을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반문만 던지고 있었다. 그와의 기억들을 움켜쥐고 싶었다. 움켜쥘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움켜쥐고 있고 싶었다.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오들오들 떨며 눈을 떴다. 침대 한 구석에 쪼그리고 누워 있었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침대 시트로 몸을 둘둘 말고도 추워서 몸을 웅크렸다. 날이 밝고도 계속 비가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 기차표는 언제 사러가야 하나 표가 남아있기는 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누워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역을 그냥 지나치지 말았어야 했다. 돌아다니는 내내 그와의 기억을 곱씹는 데에만 정신을 팔지 말았어야 했다.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르쿠츠크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이곳에 누워서 반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그것들을 지울 수 있겠는가 반문하다 잠든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나는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와 함께 했던 순간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해도 결국은 돌아가 복학을 하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학교에서 그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나 궁리하는 게 맞았다. 우리는 헤어진 이후 말 한마디 나눠보기는커녕 눈 한 번 제대로 맞춰본 적도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하루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