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12장. 음미

by 문성 Moon song Kim

4. 그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지만 길을 따라가면 그를 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다가 길가에 선 그를 봤을 때 그는 이미 나를 발견하고는 피하려고 돌아서고 있었다. 멈칫하는데 그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섰다.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잘 지냈나.”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말문이 막혀 대답은 하지 못하고 마주 보고만 있는데 눈앞에서 그가 사라졌다.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다가 눈을 떴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을 멀거니 보고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이드북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지도에 블라디보스톡을 동그라미 치고 그 옆에 오늘 날짜를 적은 다음 여권과 함께 내밀었다. 역무원이 가이드북에 적어준 숫자대로 돈을 세서 건네고 여권과 표를 손에 쥐었지만 확인해보니 표는 이틀 후에나 출발하는 것이었다. 다시 날짜를 적어 보여주며 오늘이나 내일 남는 표를 물어보려고 하자 역무원은 더 이상은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구 문을 닫아버렸다. 나도 더 이상은 매달리지 않고 돌아섰다. 표는 끊었으니 안달할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이틀이나 남 있었다.


역 근처에 있는 상점에 들어가 빵 몇 덩어리와 음료수를 샀다. 물건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재빨리 계산해 돈을 내밀고 물건을 받았다. 입 한 번 열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왔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낸 게 얼마나 되었는지 몰랐다. 이제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빵조각을 우물거리며 걸었다. 비가 그치긴 했지만 날은 여전히 어두웠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에 젖은 건물들만 서 있는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가로질렀다. 숲을 지나고 강가에 이르러 강을 따라 걷다가 굽이치는 강줄기를 끼고돌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였다.


회색에 가까운 강물이 다리 중간쯤에서 오렌지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하늘 가득한 구름 틈새를 비집고 나온 오후 햇살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햇살을 받아 눈부신 오렌지색으로 반짝거렸다. 홀리듯이 반짝이는 잔물결을 따라 다리에 올랐다. 걷다 보니 다리 위에 정류장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했는데 버스정류장이 맞았다. 반쯤 부서져 철골이 드러난 벤치와 녹이 슬어 숫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버스가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햇살이 사그라질 것 같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환하게 쏟아지며 물결을 희롱했다. 햇살을 받아 안고 찬란하게 빛나는 잔물결이 꼭 태양을 똑바로 보고 있는 것처럼 눈부셨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면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가느다랗게 뜬 눈꺼풀 사이로 빛이 번져 들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게 빛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나도 그 빛 속으로 녹아들었으면 싶었다. 내 안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나 자신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들까지도 모조리 녹아들었으면 싶었다.


P1010092.JPG


바람이 무색하게 그가 떠오르고 어제 되짚던 그와의 순간들을 이어서 되짚고 있었다. 낯선 건물들 사이를 헤매다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간 강의실에서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던 사람이 그였다. 조심스레 여기가 신입생 집합 장소가 맞느냐고 묻는 나에게 천연덕스럽게 신입생이냐 반문했었다. 선배인 줄 알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를 보며 씩 웃는 그에게 어리둥절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어울렸었다. 얼마가 지나고 사람들이 말수가 적은 그를 어려워한다는 걸 알았을 무렵 우리는 이미 인문대 구석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곤 하는 사이였었다.


그는 눈부시게 빛났었다.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기 전부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픈 존재였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주변의 모든 게 함께 빛났었다. 시들하던 순간에 생기가 넘치고 지루하던 것에 신이 났었다. 그와 함께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더랬다.


어느 날 그의 마음도 나와 같다는 걸 확인했을 때 말도 안 되는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랐었다. 그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은밀히 바랐었다. 그의 손발이라도 되었으면 간절히 바랐었다. 그가 곁에 없어도 그와 함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다 해도 다른 이들과 있다 해도 내 신경은 항상 그에게로만 쏠려있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의 삶에서도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의 일과를 속속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순간에도 그의 삶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의 삶은 그만의 규칙으로 움직이는 그만의 것이었다. 나를 버리고 그의 몸의 일부라도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은밀한 바람을 알았다면 그는 역시 날 경멸해 마지않았을까.


다가온 건 그가 먼저였었다. 인문대 구석자리 벤치에 있는 나를 찾아냈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자리에 숨어있듯 혼자 앉아 있곤 했었다. 막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그날들은 하루 일과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었다. 한없이 우울하게 가라앉은 날에도 까닭 모를 불안에 어찌할 바 모르는 날에도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도망치고 싶은 날에도 그 자리에 앉아 나 자신을 다독였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나도 내 나름의 삶을 살았었다.

그가 내 곁에 앉았던 그 어느 날 이후 벤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그를 기다리거나 그와 함께하거나 그를 찾아 그곳을 지나쳤었다. 그가 날 아무리 꼭 안아주어도 그의 품 안에서 모든 게 채워지는 건 아니라는 걸 느끼면서도 모른 척했었다. 내내 같이 있다 돌아서며 밀려드는 허전함이 그와 떨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도 모른 척했었다. 나 혼자 견뎌야 하는 순간까지도 그와 함께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했었다. 그가 날 구원이라도 해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그와 함께해도 버거운 순간이 사라지진 않았었다. 나는 버거운 이유조차 그에게서 찾으려 했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안달했었다. 그가 곁에 없는 게 두려웠었다. 그가 없는 시간이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더욱 그에게 매달렸었다. 그와의 통화에 만남에 함께 보내는 순간순간에 매달려가며 그것까지도 사랑이라 여겼었다. 그랬었다. 내가 날 견뎌내지 못하고 그에게 떠넘겼었다. 그가 날 구원해주길 바랐었다. 이제야 깨닫는 이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헤어지자 했던 것이었다.


으흐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헤어지고도 그에게 나를 떠넘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리고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탓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었다. 지금도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놓아버리고 나면 더 이상 나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게 두려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잔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