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는 확연히 달라졌다. 작년까지 갈 것도 없이 몇 달 전보다도 확연히. 엄마에게 의식이 머무르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다른 누군가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로 의식이 또렷한 상태로 지내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나를 알아보는 반응속도 역시 느려졌다. 내가 말을 걸고 손을 잡고 눈을 맞추어도 엄마는 둔감한 감각 세계 속에 있는 사람처럼 천천히 나를 쳐다보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문성이구나 말한다. 사실은 정말로 나를 알아보는 것인지 아니면 가장 많이 본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엄마가 나빠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빠졌다'라고 적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달라졌다'는 단어를 적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적는다. 엄마의 상태는 확연히 '나빠졌다'. 알고 있다. 그래도 엄마는 다른 병과 달리 서서히 죽어간다. 그리고 엄마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살아간다는 건 동시에 죽어간다는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를 나는 다만 엄마를 통해 생생히 목도하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며 적어 내려 간다.
2. 그럼에도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눈앞의 장면이 그대로 나를 향해 펀치를 날리는 것 같은 순간. 나는 그 펀치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 충격은 얼얼했다가 아팠다가 슬펐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아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내가 찾아낸 그 시간을 견디어내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는 책을 읽는 것이다. 나보다 더욱 묵직한 고통을 나보다 더욱 담담하게 혹은 더욱 격렬하게 견디어낸 이들의 이야기를 글로 읽는 것은 엄청난 위로가 된다. 활자화된 그들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나를 어루만진다. 한 자 한 자 정제된 문장들 너머 역시 육박해오는 현실 속에 몸부림쳤을 그들을 짐작케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문장을 통해서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공감과 위로를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들이 충실히 살아왔듯 나 역시 충실히 살아내리라 생각한다.
특히나 올리버 색스, 그의 글을 통해서 나는 실감한다. 그가 독서를 통해서 윗 세대들과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통찰을 얻었듯 나 역시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올리버 색스는 몇십 년 동안의 신경정신과 의사로서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알츠하이머에 대해 솔직히 그리고 담담히 기술한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라는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나이 든 뇌와 노쇠한 뇌"에 대한 글로. 의사로서의 그의 기술은 정확하면서도 섬세해서 내가 경험하는 엄마의 모습들과 겹쳐지며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그가 나의 경험을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이 내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대부분은 담백한 기술 그리고 거기에 조심스럽게 붙는 몇 마디의 그의 소회가 큰 위로가 되었다. 그의 기술 속에서 그가 환자들을 그와 같은 동일한 인격으로 대했음을 그리고 그와 같이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노력했던 이들로 존중했음을 느끼게 해 주었기에 그들을 대하면서 겪었을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짐작케 했다. 내가 엄마를 보며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며 그의 사려 깊고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향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3.
...알츠하이머병 초기에 나타나는 기능장애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윽고 인지, 기억, 행동, 판단의 장애가 심각해지고 시공간적 지남력이 상실되어, 결국에는 모든 장애들이 통합되어 극심하고 전반적인 치매로 귀결된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성격 변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일부 환자들에게는 폭력 행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뇌줄기 반사보다 높은 수준의 반응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모든 가능한 피질 장애가 일어나지만, 그 지경에 이르는 경로는 환자마다 제각기 다르다.
환자들은 조만간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표현하는 능력과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 능력을 상실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음성, 감촉, 또는 음악을 간간이 감지할 수는 있다. 최종적으로 청각과 촉각마저 상실하면 의식과 피질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는데, 이 상태를 정신적 죽음이라고 한다.
-
그렇다. 엄마는 정신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이었던 의식의 상실은, 이제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잠식하고 이따금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따금 돌아오는 것마저도 단순한 형태를 넘어서지 못한다. 엄마의 상태는 현재 먹는 것, 자는 것, 용변을 보는 것, 지루하거나 심심할 때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왔다 갔다 한다. 그럼에도 요양사님들과 사람들은 말한다. 엄마는 비교적 "착한" 치매이고 굉장히 온순하고 양호하신 편이라고. 엄마만의 개인적인 특징이 엄마를 그래도 "조용하고 얌전한" 알츠하이머로 만들었을 것이다.
4.
...치매환자를 돌보려면, 특히, 이미 상당한 수준의 치매를 앓고 있으며, 상태가 비가역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환자라면, 기진맥진할 정도의 신체적 중노동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이고 거의 텔레파시에 가까운 감수성이 필요하다. 생각을 주고받는 능력이 점점 더 감소하는 데다 명확한 사고를 점점 더 못하게 되므로 환자의 의향을 알아내기 위해 극단적인 감수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들의 혼동과 지남력 상실은 끔찍한 수준이므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간병인들이 몸져누울 수 있다. 나는 의사로서 그런 경우를 자주 본다. 연로한 배우자가 남편이나 아내를 돌보다 건강을 해쳐, 환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외부의 도움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그럼에도 알츠하이머는 정신적인 죽음으로 서서히 이르는 과정이기에 정신적으로도 더불어 신체적으로도 고통스럽고 그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 역시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엄마가 의식이 흐려지면서 식욕이 점점 통제하기 어려워질수록 수면리듬이 더욱 불규칙해질수록 가장 옆에서 생활하는 아빠, 다음으로 나, 언니들과 같은 가족들이, 그리고 엄마 아빠를 돌봐주시는 요양사님들도 역시 그것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게 힘들어진다.
5.
사람들은 간혹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을 가리켜, 장애가 있다거나 통찰력을 잃었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말이 어쩌다 맞는 경우도 있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상당수의 환자들이 처음에는 자신의 상태를 인지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알츠하이머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겁을 집어먹거나 몹시 당황하게 된다. 그중에서 일부는 지적 능력과 태도를 상실하고 혼돈과 지리멸렬함이 갈수록 더해가는 세상에 직면하게 됨에 따라, 매우 심각한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더욱 차분해진다. 왜냐하면 뭔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매우 단순하고 무덤덤한 세상으로 옮겨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환자들은 거듭된 지적 퇴행을 통해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되돌아가, 내러티브적 사고에 갇히게 된다.
... 여하한 유형의 정돈된 행동도 남아있지 않은 최종 단계의 치매환자에게서, 우리는 유아기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반사 행동을 보게 된다. 우리는 더욱 인간적인 수준에서도 괄목할 만한 (그리고 때로는 매우 가슴을 에는 듯한) 행동적 퇴행을 볼 수 있다. 내가 치료하는 한 여성 환자의 경우, 인형을 건네받으면 즉시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마치 보살피려는 듯 가슴에 품고, 팔에 안고, 껴안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그러한 모성적 행동을 보이는 동안 그녀는 완벽하게 차분하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다시 초조해하며 일관성을 잃게 된다.
-
정말로 가슴이 에는 순간은, 올리버 색스가 말한 그대로, 엄마에게서 인간적 수준에서의 행동적 퇴행을 볼 때다. 엄마는 지적 퇴행이 심각해져서 이제는 그 어떤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내러티브적 사고조차 일분 이상 진행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이따금 나를 "알아볼 때"가 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요즘 별일 없지, 괜찮아,라고 다 아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다독이거나 우리 문성이,라고 이야기하며 내가 안는 걸 받아 함께 안을 때. 그러나 그 행동은 일분도 채 가지 못하고, 엄마는 다시 초조해하며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마치 그런 순간이 없었던 것처럼.
6.
...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강렬한 인간성을 유지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말기에 이를 때까지 통상적인 감정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아 보존은 환자나 가족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아가 보존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환자의 황폐화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환자의 개성이 비교적 보존된다는 것은 매우 광범위한 지지 및 치료활동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러한 활동들의 공통점은 개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개인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예배, 연극, 음악과 예술, 원예, 요리, 그 밖의 취미활동들은 개인성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아줄 수 있으며, 초점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은 연상력이 풍부하여 환자의 기억, 감정, 과거의 권력과 세상사 중 일부를 잠시 동안 되돌리므로, 최소한 일시적으로 '깨어남'과 삶의 충만함을 가져다줄 수 있다. 지지 및 치료활동을 경험하지 못한 환자들은 이러한 이점을 누릴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잊히거나 무시되어 당황함과 공허감에 휩싸이며, 언제든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상상할 수 없는 혼동과 패닉에 빠질 수 있다.
-
엄마의 초점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노래. 그리고 기도이다. 엄마는 오랫동안 성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를 다녔고 합창단으로도 활발히 활동했기에 엄마의 자아가 붕괴되는 와중에도 일시적으로 엄마를 "깨어남"으로 데려온다. 이전에 엄마가 자식들을 다 키우고 빈 둥지 증후군으로 인한 우울증에 고통받았을 때에도 그 두 가지가 엄마의 중심을 잡아주었다는 것을 안다.
이따금 엄마가 지남력의 상실에 마주하고 극도로 혼란스러워할 때, 엄마의 눈이 초점 없이 방황하고 엄마가 앉아있는 거실의 소파가 거실인지 우리 집인지도 몰라할 때, 나는 엄마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줄래, 부탁한다.
엄마는 정말로 놀랍게도 일시적으로 초점을 회복하고 경건하고 정성이 들어간 또렷한 목소리로 나를 위해 기도한다. 비록 문장이 점점 짧아지고 단어들의 개수가 줄어도, 여전히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순간 나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지극히 양면적인 두 감정이 함께 밀려온다.
7.
... 뇌가 건강하려면, 최후의 순간까지 활발하고 경이로워하고 놀고 탐구하고 실험해야 한다. 그런 활동이나 성향은 기존의 기능적 뇌영상 촬영이나 신경심리 검사에서 탐지되지 않겠지만, 뇌의 건강을 규정하는 정수이며 평생 동안 뇌의 발달을 유도한다. 이는 에덜먼의 신경생물학 모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 모델에서는 뇌/마음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평생에 걸쳐 그 활동을 범주화/재범 주화하며, 해석과 의미를 더욱더 높은 수준에서 구성한다고 간주한다....
... 우리는 평생학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뇌의 노화나 질병에 직면하더라도, 다른 과정들이 훨씬 더 심오한 수준에서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 과정들은 뇌와 마음속에서 평생 동안 진행되는 더욱더 넓고 깊은 일반화와 통합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운 좋게 건강한 노년에 도달한다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열정과 생산성을 유지해주는 것은 '삶의 경이로움'일 것이다.
-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혼자 기도해본다. 최후의 순간까지, 찰나일지라도, 엄마가 경이로운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나의 삶이 열정과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기를. 늘 놀고 탐구하고 실험하며 삶의 경이를 즐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