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지나가버린 이야기
5. 그날 이후 지혁 오빠를 만나면 인사부터 했다. 지혁 오빠뿐만 아니라 누구든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만 하면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상대방이 인사를 받기도 전에 어디에 가고 있었는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물어댔다. 그렇게 묻고 나면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아도.
짐짓 경청하듯 눈을 맞추고 맞장구치며 몇 마디 덧붙이다가 수업시간이 다 되었노라고 혹은 과제 때문에 가봐야겠노라고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나면 그만이었다. 사람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건 등하굣길이나 수업시간 전후 강의실로 향하는 길목 어디쯤이었으니까. 내가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시계를 확인하고 나중에 보자며 발길을 재촉하기 일쑤였다.
매점에서 끼니를 때우거나 배식시간이 끝날 즈음에 맞춰 식당에 가는 것도 그만뒀다. 매점 아주머니에게 돈을 건네다가도 줄을 서서 식판을 집다가도 아는 얼굴을 마주치면 못 본 척 지나쳐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피하는 것도 지겨웠다. 배가 고프면 그냥 식당으로 갔다. 사람들과 마주치면 무조건 웃으며 인사부터 했다. 사람들이 인사만 하고 지나치면 지나치는 대로 같이 먹자고 하면 먹자는 대로 앉아 밥을 먹었다. 나아가 뻔히 알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어보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 것처럼 열을 올리며 감 놔라 배 놔라 떠들어댔다. 화제가 나에게 돌아올 짬이 나지 않도록.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자 축제에 이어 선거까지 학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썩거렸다. 수업에 들어갔다가 휴강이라고 적힌 칠판을 보고 그대로 나오기도 하고 수업을 듣다가도 마이크 소리가 강의실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바람에 중간에 수업이 끝나기도 했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도 운동장에서도 행사가 벌어지고 곳곳에 나붙은 포스터와 대자보들 그리고 땅바닥에 흩날리는 전단지들이 절정에 이른 단풍보다도 어지럽게 학교를 수놓고 있었다.
과에서도 축제기간에 맞춰 과밤을 시작으로 사제 체육대회와 총엠티까지 행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과밤은 술집 사제 체육대회는 운동장 총엠티는 교외에 있는 민박집이라는 것만 다를 뿐 셋 다 교수들부터 학부생들까지 모여서 밤새도록 술이나 마시는 자리였지만 거기에 나가 머릿수를 채우고 앉아 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워섬기며 흥청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간혹 사람들이 나를 화제로 삼거나 내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못 들은 척 화제를 바꾸고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돌려 빠져나가기만 하면 쉬지 않고 나불거려도 내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매번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지혁 오빠나 다른 선배들은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죽을 맛인지 푸념하고 미정이를 비롯한 동기들은 졸업을 하려면 학점이며 졸업논문이며 신경 써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또 대학원 시험이든 취업이든 준비하는 게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투덜거렸다. 후배들도 후배들대로 진로를 결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소연했다. 다들 경쟁이라도 하듯 자신의 일과가 얼마나 힘든지 늘어놓다가 자리가 끝났다. 결국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골몰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과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와 헤어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은 내 앞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와 함께 나를 지나치고 그가 있는 곳에 나를 부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굳이 우리 둘을 맞붙이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따로 떼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같은 과 동기 정도로 돌아왔다고들 여기는 것 같았다. 지혁 오빠를 비롯해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와 나 사이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우리를 대하고 있었다. 문제가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 눈에는 내가 그와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사실은 사람들과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못 본 척 지나쳤다. 사람들 앞에서도 내색하지 않을 뿐 서로를 투명 인간처럼 대했다. 사람들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면 못 들은 척 어물쩍 넘기고 마주친 사람들 속에 그가 있어도 다른 이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는 듯 곁에 있는 다른 이에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그도 역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내가 있으면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잠자코 뒤로 물러나 기다리거나 나 때문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른 핑계를 대면서 요령껏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용하게 넘어간다 해도 마음이 시끄러운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다가도 그를 뒤로 하고 돌아설라치면 그 순간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돌아서서 걷다가도 어디에 가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멈춰 섰다.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서도 강의는 듣지 않고 나도 알아볼 수 없는 낙서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놓치고 우물거렸다.
없앨 수가 없었다. 그게 집착이든 사랑이든, 그 실체가 무엇이든,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질 않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제 멋대로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처럼 그렇게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라지지 않는 대로 두는 수밖에 없었다. 흘러가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에 대한 내 마음을 나와 별개로 인정하고 나자 어느 결엔가 내 마음을 다른 이의 마음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정말로 나하고 분리되어 있는 듯 여겨졌다. 그를 마주하며 일어나는 감정들이 나를 휘두를 때마다 다른 이에게 하듯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다독여가며 못 본 척 그를 지나치고 수업을 듣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정말로 괜찮았다. 괜찮지 않을 게 없었다. 사람들도 학교도 나를 둘러싼 것들 모두 그대로였다. 내 삶은 그와 상관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마음은 마음일 뿐이었다.
그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격랑이 돼 나를 덮치던 감정들은 작은 파도가 돼 나를 때리고 점차 잔잔하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잔물결이 돼 나를 흔들었다. 더 이상 밖으로 폭발할 듯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니라 안으로 흘러들었다. 내 안 깊숙한 어딘가에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