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연설

13장. 지나가버린 이야기

by 문성 Moon song Kim

4. 할 일이 많았다. 오전에 수업 둘 오후에 시험 둘. 점심시간에는 다음 주 조 발표 준비모임이 있었다. 중앙도서관에 대출한 책도 반납해야 하고 전산실에 들러 리포트도 뽑아야 했다. 노트를 펴고 수업시간에 필기한 걸 훑어보다 말고 오늘 할 일을 꼽아보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몇 정거장 지나면 갈아타야 했지만 일단은 자리에 앉았다. 노트를 조금이라도 더 훑어보는 게 먼저였다. 공부를 해두긴 했어도 지금 틈틈이 봐 두지 않으면 이따가는 노트를 펴보지도 못한 채 시험을 보러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이번 역은 6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환승역을 알리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지하철 끄트머리로 모여들었다. 나도 질세라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튀어나가 오른쪽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달려가 두 계단씩 뛰어올라가서는 에스컬레이터 꼭대기에서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다음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렸다.


갈아탈 승강장으로 내려와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기둥을 두 개 지나고 자판기 앞에 있는 자리에 섰다. 내리자마자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그러니까 가장 빨리 지하철역에서 나가 마을버스를 탈 수 있는 위치였다. 4-3. 까맣게 때가 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숫자를 읽었다. 이제는 승강장 번호도 외울 지경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다 타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문이 열리면 곧바로 뛰어올라갈 수 있도록 가방을 고쳐 메고 맞은편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와 나를 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서도 전속력으로 달렸다. 도서관 계단을 뛰어올라가 반납대에 책을 올려두고 사서가 책을 가져가는 걸 확인하기도 전에 전산실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헐떡거리며 메일함의 리포트 파일을 열고 인쇄 버튼을 누른 다음 리포트가 인쇄되어 나오기만 기다렸다가 낚아채듯 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도서관 통로를 지나고 인문대와 자연대로 갈라지는 길목을 지나며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인문대 내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서 멈추고 말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헛구역질이 나왔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헉헉대고 있었다.


“어이! 김연희!”


지혁 오빠가 계단 아래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숨넘어가겠다, 숨넘어가겠어. 뭐가 그렇게 바빠, 인마.”


거리가 너무 가까워 못 들은 척할 수가 없었다.


“너도 9시 수업이냐? 아직 삼십 분 남았으니까 음료수나 하나 마시고 들어가자.”

“할 일이, 많아서, 먼저 갈게, 오빠.”


손을 내저으며 발을 뗐다. 헐떡거리던 숨을 다 고르지도 못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 어, 야! 너만 학교 다니냐? 만날 그렇게 바쁜 척할래!”


등 뒤에서 외치는 지혁 오빠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들과 부딪혀 연신 사과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강의실에 도착해서 의자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가방을 열고 노트와 파일을 찾았다. 등이 땀으로 젖고 있어도 점퍼를 벗을 생각은 하지 않고 노트를 펼쳐 아까 다 보지 못한 필기부터 훑어 내려갔다. 무조건 읽고 있었다. 글씨를 따라 읽고는 있었지만 글씨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지혁 오빠 말이 맞았다. 바쁜 척하고 있었다. 바쁜 척이라도 해야 했다.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강의실에서 나오자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터덜터덜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가방이 달그락거렸다. 다 쓴 시험지를 들고 일어서며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은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텅 빈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나까지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건물에서 나와 내정을 가로질러 오른쪽 구석에 있는 벤치로 갔다. 역시나 비어 있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벤치에도 내정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벤치에 내려놓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벤치에 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아까 조별 모임에서 나눈 분량을 요약하고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고 내일까지 내야 하는 리포트도 마무리해야 했다. 모레에 시험 볼 과목 참고자료도 오늘부터 봐 두지 않으면 내일 하루로는 턱없이 부족할 게 뻔했다. 당장 일어나 도서관으로 가든가 집으로 가서 책상 앞에 앉아야 하는데 하늘이 너무 파랬다. 파랗디 파란 빛깔에 눈이 시렸다. 시리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아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목을 꺾고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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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도 되냐?”


화들짝 놀라 쳐다봤다. 또 지혁 오빠였다.


“얼핏 보고 혹시나 하고 와봤더니만. 만날 이렇게 혼자 처박혀 있었구먼.”


답하기도 전에 어깨를 툭 치더니 내 옆에 앉았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쩔 수 없이 나란히 앉아 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 피하고 싶었지만 핑곗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지혁 오빠는 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듯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나도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반쯤 물든 단풍나무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몇 년을 봤어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지혁 오빠가 옆에 있다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빠져들 만큼.


“이제 그만 좀 해라.”


지혁 오빠 얼굴을 쳐다봤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만 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단호한 말투였다.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래. 아직도 정리가 안 됐냐. 이제는 아예 사람들도 피해 다니고, 인우랑 부딪히면 얼굴 굳히고 피하고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았냐. 좋든 싫든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고 있냐. 다른 사람들까지 어색하게. 다들 얼마나 불편해하는지는 아냐. 너 혼자 사귀다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좀 지내자. 겉으로라도 잘 지내는 게 모두한테 좋지 않겠냐.”


작심한 듯 쏟아내는 지혁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솔직히 봐달라고 하는 거 아냐, 허구한 날 우울한 얼굴로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거, 일부러 엎어져 있는 거 아니냐고. 나 좀 봐달라고. 봐줄 사람도 없구먼. 너희가 헤어진 게 언젠데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음 어떡하냐. 정신 못 차리고. 그만 털고 일어나.”


지혁 오빠가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 몰랐다. 차창 너머 버스 정류장에 서서 나를 배웅하는 지혁 오빠의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보일 만큼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나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질 않고 오빠가 입고 있었던 셔츠의 푸른색 체크무늬만 떠올랐다.


오빠가 열변을 토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일 때마다 푸른색 체크무늬 칼라 뒷면의 빨간 배색이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일장연설이 끝날 때까지 셔츠 칼라가 움직이는 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고개를 들다가 마주친 눈에 짐짓 웃어 보였다. 오빠는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벤치에서 일어나며 “거봐, 괜찮잖아”하고 덧붙였던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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