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짜여 흘러가는 하루하루

14장. 어둠에 잠긴 풍경

by 문성 Moon song Kim

3. 그와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시험기간 내내 밤을 새우다시피 중간고사를 치르고 스펙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들 하는 워드프로세서 시험도 컴퓨터 활용능력 시험도 치렀다. 곧이어 학기말이 다가오고 기말고사뿐만 아니라 인턴십을 준비하느라 전쟁처럼 학기를 마감해야 했다. 방학에도 프린트와 복사 그리고 서류철 정리와 심부름으로 점철된 인턴십에 영어시험과 면접을 대비한 스터디로 쉴 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추가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 해야 할 일들을 늘려가며 그와는 상관없는 나날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지막 학기와 더불어 하반기 취업시즌이 시작되고 취업게시판에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공고들이 속속 나붙을 무렵에는 취업 외엔 안중에 없었다. 닥치는 대로 서류전형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준비하는 동시에 무사히 학기를 마치고 졸업이 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대학입시 때보다도 초조해하며 합격여부를 기다렸다.


합격통보를 받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기도 했고 불합격 통보를 받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몇 군데에 붙고 몇 군데에 떨어졌는지 미처 다 세어보지도 못한 채 다음 원서를 내고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면접을 보러 간 회사에서 준 면접비로 배불리 점심을 먹고 다음 면접을 보러 갈 만큼 배짱도 두둑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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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에는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지만 느긋할 만할 여유 따윈 없었다. 서너 군데 최종 면접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면접으로 빼먹은 수업을 대신할 과제를 하고 졸업논문을 쓰느라 하루하루가 빠듯했다.


차례차례 불합격 통보를 받고 마지막 면접 결과를 알리는 문자를 받은 것도 기말고사를 보는 와중이었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에서 나와서도 곧바로 핸드폰을 열어보지 못하고 걷고 또 걸었다. 정문 앞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핸드폰을 꺼내서는 누가 볼까 남들 몰래 문자를 확인했다. “귀하는 본사에 최종 합격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한 문장에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뻐근해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핸드폰을 꼭 쥐고 놓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지만 새로운 시작이었다. 입사 번호를 부여받는 것부터 신체검사를 비롯한 각종 절차를 거쳐 오리엔테이션에 이르기까지 대학생활과 비슷한 듯 또 다른 회사생활이 펼쳐졌다.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인터넷 연수를 듣고 과제를 제출하느라 졸업논문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회사의 동영상 강의를 들여다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러고도 합숙연수를 떠나느라 졸업논문은 직접 제출하지도 못하고 조교실에 메일을 보내 출력을 부탁해야 했다. 마지막 방학을 만끽할 틈도 없이 방학 내내 연수를 받아야 했지만 내심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선택을 고민할 필요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꽉 짜여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심지어 감사했다.


한 번도 그가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떠오르면 서둘러 머리를 털고 하던 일에 매달렸을 뿐. 내 앞에 놓인 일들을 해치우기도 바쁜데 그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까웠다. 이따금 곧바로 털어내지 못하고 그와의 순간들을 곱씹다가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차피 이젠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정말로 그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이 그랬다는 게 어찌 보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해 주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졸업식 날 그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전날 밤부터 오로지 졸업식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학교를 떠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2년도 더 지나서 학교에 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졸업을 하긴 하는구나 시원해하다가도 졸업식을 하고 나면 이제 학교에 갈 일은 없겠지 섭섭해하며 밤늦도록 감상에 젖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채비를 하면서도 조금은 들떠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언니까지 온 가족을 대동하고 학교에 도착했을 때에는 정문을 마주하는 게 감격스럽기마저 했다.


엄마 아빠가 정문 앞에서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감격은 곧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칼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왼쪽 오른쪽 앞으로 뒤로 주문에 맞춰 한참을 움직인 끝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파와 주차장이나 다를 바 없이 늘어선 차들 사이에 끼어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확인하고 있는데 아빠는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대강당으로 향했다. 식이 거의 끝났을 테니 졸업가운을 받아 사진이나 찍자는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강당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빠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식이 끝나고 나서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인문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빨리 마무리하고 학교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인문대에 도착하자마자 가운을 빌려다가 언니에게 맡겼다. 엄마 아빠 사진부터 찍어달라고 얼른 끝내고 가자고 귀띔하고는 서둘러 조교실로 가서 조교 언니가 챙겨주는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받아 들고 나와서야 한숨 돌렸다. 항상 그랬듯 어둑한 계단을 내려와 냉기가 도는 싸늘한 복도를 지났다. 수없이 오가던 곳이었다. 현관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자꾸만 발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현관 유리문 너머 내정에 있는 우리 가족이 보였다. 언니는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엄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아빠에게 꽃다발을 떠안기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현관문을 밀고 나오는데 누군가 내정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엄마 아빠를 지나고 언니 곁을 지나치다 멈추더니 언니에게 꾸벅 인사했다. 언니 얼굴이 어리둥절하다가 떨떠름하게 바뀌고 있었다. 언니가 인사를 받기도 전에 언니를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며 아는 척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봤다. 나를 보는 그의 얼굴도 굳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문을 밀었다. 그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쳤다.


언니가 빨리 오라고 손짓했지만 걸음을 서두르진 않았다. 언니는 내가 멈춰 서기도 전에 내 옆에 바싹 붙어서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맞지”하고 엄마 아빠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언니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다시 잘 지내고 있었던 거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인 거야? 아니면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내는 사이야?” 추궁하다가 계속 머리를 가로젓기만 하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그랬지? 나한테 깍듯하게 인사하던데? 그럼 아까 너랑은 인사도 안 한 거야?” 또다시 소곤거리는 언니에게 딱 잘라 답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야. 아니 그것보다 못한 사이야.” 아빠와 팔짱을 끼고는 언니를 향해서 “언니, 우리 사진 찍어 주라”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언니는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앞장서서 우리를 끌고 다니며 학교 곳곳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가운을 입고 꽃다발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도 그와 마주한 순간이 떠올랐다. 수없이 다짐했었다. 다시 그를 만나면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이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리라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버리던 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시원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내가 지나칠 때까지 못 박힌 듯 서 있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럴 줄은 몰랐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무거워지고 있었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반문하고 있었다. 그도 날 외면할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씁쓸해졌다. 그래도 그가 미웠다. 또다시 그를 떠올리고 있는 나도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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