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모르겠니? 다 끝난 거야

14장. 어둠에 잠긴 풍경

by 문성 Moon song Kim

4. 걸음을 멈췄다. 눈이 날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때문인지 해가 지고도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건지 가물거리는 눈송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려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멀어지고 다가왔다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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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의 일도 기억나질 않았다. 언니가 엄마 아빠를 모시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돌아서는 길인데도 지켜보던 뒷모습이 얼른 떠오르질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는 학교 앞 식당에서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식당에 가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사진은 한두 장만 찍으면 될 걸 쓸데없이 많이 찍어대느라 밥도 제때 못 먹는다며 아빠가 언니를 나무랐다. 내정에서 언니가 엄마 아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문대 현관을 나서다 그와 마주쳤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빨간 간판의 삼겹살집이 보였다. 저 간판을 끼고돌면 먹자골목의 시작이었다. 습관처럼 걸음을 옮기면서도 익숙하기보단 낯설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좁은 골목길에 빽빽한 간판들이 알록달록했다. 예전에도 이랬던가 싶을 정도로 조잡하다 못해 유치하게 번쩍거렸다. 곳곳에 술에 취해 주저앉아 있거나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나도 저들과 똑같은 순간이 있었음에도 그 모습들이 눈에 거슬렸다. 사람들과 약속한 호프집 앞에 도착해서는 처음 찾아온 사람처럼 간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FIZZ. 수없이 드나든 곳이었건만 저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쩌렁쩌렁한 음악소리와 시끌벅적한 사람들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귀를 틀어막고 술집 안을 훑어보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한쪽 구석에서 나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달아오른 얼굴들이 보아하니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미정이가 외치며 나를 끌어다 앉히자마자 “졸업식이라고 신경 좀 썼는데요” 정수가 어깨를 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취직하더니 때깔이 달라졌구먼. 밖에서 만나면 나 같은 군바리는 아는 척도 안 하는 거 아니야” 지혁 오빠가 바통을 이어받아 예의 그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고는 받아칠 겨를도 주지 않고 잔을 쥐어주고 술이 넘칠 때까지 따르고 잔을 부딪쳤다. 셋이 한 몸이 된 것처럼 동시에 원샷을 하고 잔을 내려놓더니 또다시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몇 달만의 만남이라 그런 건지 나만 취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자의 반 타의 반 쉴 새 없이 술을 들이키며 사람들을 따라잡으려 애를 써야 했다.


간간이 안주를 곁들이듯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잘 시간도 부족한 회사 연수 이야기가 정수의 진로 고민으로 바뀌고 다시 미정이의 끝도 없는 잡무와 교수님 수발로 공부할 여력이 없는 대학원 생활로 바뀌었다가 지혁 오빠의 이해할 수 없는 장교 보직체계와 개념 없는 선임 이야기로 이어졌다. 모두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버거운가 토로했다. 어느새 테이블에는 빈 술병들이 늘어서고 다들 말없이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벨을 눌러 술을 더 시키고 종업원이 다시 술을 가져오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빈 잔을 들었다.


“분위기 바꾸자, 바꿔.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칙칙하네, 이거.”


또 한 번 잔을 비우고 내려놓는 순간 지혁 오빠가 말문을 열었다.


“이럴 땐 연애 얘기가 최고지. 연희야, 뭐 좋은 소식 없냐?”

“왜 콕 집어서 나야? 좋은 소식은 무슨, 아무것도 없어.”

“여기서 환경이 제일 많이 바뀐 사람이 너잖아.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을 거 아냐.”

“하긴 형 말이 맞네. 회사에 누나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나도 궁금하다. 어때? 물 좋아? 멋있는 사람은 좀 있어?”

“없다니까.”

“에이, 왜 이러시나. 설마 괜찮은 사람 하나 없을라고. 솔직히 말해, 이것아.”

“그러게, 누나 왜 빼고 그래요. 누나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야, 급하다니까.”

“내 말이, 너 분발해야 된다. 인우는 요즘 분위기 좋던데. 주변에 여자들이 아주.”

“하, 지금 단체로 내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럼, 우리가 얼마나 널 걱정하는 줄 아냐. 인우도 걱정하더라, 인마.”

“그 새끼가 내 걱정을 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


내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내가 움찔하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정말로 내 걱정을 한다고 생각해? 무슨 근거로? 오빠가 뭘 아는데? 그 새끼 마음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나 보지?”


지혁 오빠가 빈정거리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정수도 미정이도 지혁 오빠하고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래, 내가 그 속을 어떻게 다 알겠냐. 근데 가끔 물어보긴 하더라. 너 잘 지내냐고.”


지혁 오빠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제 그만 해라. 아직도 모르겠니. 다 끝난 거야.”


지혁 오빠 말이 맞았다. 입이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지혁 오빠가 술을 따라주는 것도 잔을 부딪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지만 굳은 얼굴이 풀어지지도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지도 괜찮은 척 웃어 보이지도 않았다. 미정이와 정수가 앞 다퉈 신세한탄을 해대며 분위기를 수습해보려고 애를 썼다. 둘이 서로 내가 더 문제라고 실랑이하는 걸 지켜보며 잔을 몇 번 비우고는 막차시간을 핑계로 일어섰다. 붙잡는 미정이와 정수를 할 일이 많다는 뻔한 핑계로 또 한 번 뿌리치고 떨떠름한 얼굴들을 뒤로한 채 술집에서 나왔다.


술을 꽤 많이 마셨는데도 모든 게 또렷했다. 아니 술을 마시기 전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작은 눈송이 하나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쓰레기와 토사물로 지저분한 골목길 모퉁이에도 발자국으로 어지러운 거리에도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바람이 몰아쳤다. 나를 덮칠 듯 휩싸고 돌며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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