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자리

14장. 어둠에 잠긴 풍경

by 문성 Moon song Kim

5. 불을 끄고 누워서는 잠들지 못하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그의 이야기를 전하던 지혁 오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와 마주치던 순간도 그의 얼굴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쳐다봤다. 잊은 줄 알았다. 이따금 떠올라도 그뿐 괜찮은 줄 알았다.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면 들리는 대로 흔들리고야 마는 내가 싫었다. 기다렸다는 듯 드러나는 내 모습이 경악스러웠다.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팔딱거리는 감정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 마음은 사라지질 않는 걸까.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달라질 게 없었다. 무얼 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끝내야 했다. 바닥을 더듬어 충전기에 꽂아놓은 핸드폰을 찾았다. 폴더를 열고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문자를 적다가 닫아버리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창을 열고 학번 커뮤니티에 들어가 회원 리스트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메일 보내기를 클릭했다. 제발 끝내고 싶었다. 이 모든 걸.


사람들에게 내 안부 묻지 마라. 마치 날 걱정하는 것처럼. 결국 내 귀에 들어오니까. 내가 알기론 우리는 서로를 걱정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헤어지던 날 다른 동기들처럼 친구로 지내자고 했었지. 하지만 넌 우연히 마주친 순간에도 얼굴을 굳히며 지나쳤다. 일 년 전인가 다시 연락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나서도 연락 한 번 없었지.

친구로 지내는 시늉을 할 마음 같은 건 남지 않았다. 우연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내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다. 정말로 날 걱정하는 거라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내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타자를 두드렸다. 거침없이 글자를 쏟아내다가 제목 입력란에서 손이 멈췄다. “인우에게” 네 글자를 썼다가 지우고 “연희가” 세 글자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인우에게 연희가” 일곱 글자를 썼다가 아예 제목 입력란을 비웠다.


스크롤을 내려 전송하기 버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리고는 곧바로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마우스 휠만 돌리고 있었다. 스크롤이 올라가며 메일 본문 창이 화면 한가운데로 내려왔다. “사람들에게……” 첫 문장을 읽다 말고 다시 스크롤을 내려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끝까지 읽다 보면 보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메일이 발송되었습니다.” 안내문이 뜨자 컴퓨터를 끄고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잘했어.” 중얼거리며 이불속으로 기어들었다. 언제고 쏟아내고 싶던 말이었다. 전화로는 할 수 없었다.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거절할지도 몰랐다. 아니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그의 얼굴을 보며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메일을 보내는 게 맞았다. 누워서 눈을 감고는 “잘했어. 잘한 거야” 다짐하듯 되뇌었다.


누가 어깨를 흔들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엄마가 쯧쯧 혀를 차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도대체 언제 일어나려고. 지금이 몇 신 줄은 알아?” 잔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일찍 일어나서 다 같이 아침 먹으면 좀 좋아? 밥통에 밥 있으니까 밥만 퍼서 먹고 반찬 냉장고에 넣어놔. 언니도 나갔고 우리도 교회 다녀올 테니까.” 엄마는 방문을 닫으면서도 타박했다. “앞으로 출근은 어떻게 하려고,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니기나 하고, 얼마나 많이 마셨으면 저렇게 정신을 못 차려 그래.” 멍청히 듣고만 있었다.


엄마 아빠가 나가고 나서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머리가 울리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속이 메슥거려 일어날 수 없었다. 실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어젯밤 저지른 짓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 가고 해가 질 무렵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TV를 보며 뭉개고 있다가 방에 들어와서도 컴퓨터는 쳐다보지도 않고 출근 준비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컴퓨터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 창을 열고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느릿느릿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로그인 버튼을 누르며 숨을 들이마시다 멈췄다. 새로운 메일이 하나 있었다. 그의 답장이었다.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 네가 말한 대로 하지. 난 우리가 편해졌으면 했다. 어떻게 해야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몰라 어색하긴 하지만. 나도 네 굳은 얼굴을 대하기 힘들었다. 물론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서로 불편해하고 있다는 거지. 다시 한번 말하면, 어떻게 해야 편해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너에겐 내가 잔인하고 어이없는 놈이겠지. 난 그런 놈이다. 이젠 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난 이런 종류의 일로 고민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실제로 그러지도 않는다. 내 일과는 우연과 이유 없음이 대부분이지만 넌 나와 반대지. 넌 네 모든 순간을 뇌세포 하나하나에 박아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묘한 감정들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기억들을 머릿속에 새기고 반추하는 일은 나하고는 정말로 거리가 먼 일이다. 우리가 다시 편해지길 원한다면, 혹시라도 그런 일을 시작한다면, 이 점이 우리에게 어려움이 되겠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너도 나처럼 편해졌으면 좋겠다. 모든 게. 혼자 뒤돌아서서, 네가 만들어둔 것만 쳐다보지 말고, 돌아서라. 네 말대로 나는 널 그냥 지나쳤는지는 몰라도 혼자 돌아서 있진 않았다. 이렇게라도 그동안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분이 참 묘하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을 꺼낸 네가 부럽고 한편으론 고맙다.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자꾸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물어도 눈물이 쏟아졌다. 숨을 죽여도 어깨가 들썩였다. 어째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역시 넌 나와 정반대로구나 이야기할까. 울컥 치밀었다. 그에게 화가 나는 건지 나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복받쳐 올랐다.


답장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지. 사실은 답장을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네가 답장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우리가 편해지길 바란다는 네 말에도 고마워야겠지만 사실은 그것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네가 정말로 우리 관계가 편해지길 바라고 있다 해도, 그 말을 하게 되는데, 너무 늦은 것 같다. 우리에게 그럴 만한 기회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네 말대로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날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 돌아서서 내가 만들어둔 것만 쳐다보고 있다고 했나. 너야말로 네가 만들어둔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를 지켜보지도 못했고 대화를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했지. 나도 네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너도 날 모르지. 나는 내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네 나름대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억지로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편안해질 수 없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갈 테지. 나는 내 자리에서. 너는 네 자리에서. 잘 지내길 빈다. 정말로.


“정말로” 뒤에서 커서가 깜박이며 다음 단어를 재촉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쓸 말이 없었다. 이게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의 답장이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일이 발송되었습니다.” 안내문이 뜨는 걸 확인하고 컴퓨터를 껐다.


욕실에 가서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고는 세수는 하지 않고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있는 힘껏 눈을 떠봐도 눈두덩이 부어 게슴츠레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눈가는 울긋불긋했다. 뺨에는 눈물자국이 지저분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꼭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었다. 언젠가 그가 보고 있었을 내 얼굴도 이랬을까.

불을 끄고 누워서도 그가 보았을 내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려보려고 애를 써 봐도 그려지질 않았다. 내가 나인 이상 그가 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끝끝내 각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서툴고 어리석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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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을 둘러봤다. 옷장에서 책장으로 책장에서 책상으로 책상에서 의자로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가 누워 있는 이부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물건들이 느껴졌다. 그 자리 그대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눈을 감았다. 나도 어둠에 잠겨 가라앉고 있었다. 동시에 저 위 어딘가에서 어둠에 잠긴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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