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만의 연락

15장. 무엇하나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by 문성 Moon song Kim

1.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숫자들이 원망스러웠다. 몇 년을 해도 엑셀 작업만은 능숙해지질 않았다. 우리는 몰라도 윗분들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으니까 표를 그래프로 바꿔서 삽입하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하던 팀장님의 태연한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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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하고 사람들 앞에서 지적할 거면 발표하기 전에 괜찮다고 하지를 말든지 새삼 짜증이 치밀었다. 발표에서는 태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설득력 운운할 거면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냐고 그 자리에서 한 마디 날렸어야 하는데 뒤늦게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다 퇴근하고 사무실에는 나 하나만 남아 있었다.


다시 모니터에 집중해보려고 해도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질 않고 빙글빙글 돌았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목도 아프고 등도 뻐근해서 기지개를 켜다가 힐끗 시계를 쳐다봤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냥 집에 가서 할까 아니면 저녁이라도 먹고 올까 고민하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세웠다. 어영부영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죽일 게 뻔했다. 마음 편하게 주말을 맞으려면 대강이라도 끝내고 가는 게 나았다.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는 순간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했지만 지이잉 지이잉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마지못해 핸드폰을 확인했다. 미정이었다.


“이게 누구야. 친구야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아니, 아니지, 잘 못 지내고 있지. 야근 중이야.”

“너무 바쁜 거 아니야. 저번에도 야근하느라 약속 깨더니. 얼굴 잊어먹겠다.”

“그러게. 근데 그 약속이 네 논문 심사 때문에 한 번 미룬 거라는 건 기억 안 나냐.”

“할 말이 없네. 우리 왜 이러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얼굴 한 번 못 보고.”

“내 말이. 돈이나 많이 벌면 말을 안 해. 우리 못 본 지 얼마나 됐지?”

“안 그래도 내일 시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지혁 오빠하고도 연락했는데 내일 저녁에 된다고 하더라고. 간만에 셋이 저녁 먹고 술도 한 잔 하자.”

“내일? 지방에서 회사 동기 결혼식이 있어서 다녀오면 저녁 늦게야 될 것 같은데.”

“너만 괜찮으면 잠깐이라도 꼭 봤으면 좋겠는데. 줄 것도 있고.”

“줄 것……? 너 혹시?”

“내일 보자. 만나서 이야기하자. 너 야근한다며.”

“하긴 내일 만나서 얘기하려면 이것부터 끝내야겠다. 일단 끊자.”

“그럼 내일 서울 올라올 때 연락해. 지혁 오빠 만나서 기다리고 있을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우스를 잡았다. 눈으로는 표 변환하기 메뉴를 훑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미정이를 만난 게 언제였는지 더듬고 있었다. 봄에는 내가 야근하느라 약속을 깼다. 겨울에는 미정이가 논문 발표 날짜가 미뤄져서 못 볼 것 같다고 통화했고 가을에도 미정이는 미정 이대로 나도 나대로 주말마다 일이 생겨서 못 보고 지났다. 논자시가 끝나서 홀가분하게 여름방학을 맞는다고 좋아하던 미정이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본 게 여름이 시작될 즈음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다.


일 년 만에 만나서 주려는 게 졸업논문일 리는 없었다. 갑작스레 줄 게 있다고 약속을 잡는다면 지난 몇 년간의 경험상 청첩장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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