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되찾는 방법

의"식"주일상실험

by 문성 moon song

1.

틈을 쪼개 글을 이어본다. 글쓰는 습관을 잇기 위해서도 있지만 정신없이 지나온 일상을 되돌아보며 감사함을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두달 전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늦은 여름휴가였다. 개관준비, 개관직후 전시실 정비 및 운영, 도록원고 작성 및 편집 마무리를 하면서 아무리 늦더라도 긴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빠듯한 스케줄에 육체적으로 탈진한지 오래였다. 쫓기듯이 데드라인에 맞춰 원고를 쏟아내고 또 여러가지 제약에 부딪혀 전전긍긍하며 사진을 구하고 레이아웃을 고민하며 책을 만들다보니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지고 있었다. 어디로든 떠나서 쉬지 못하면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일이 싫어지고 이렇게 일하며 사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지고 있었다. 3교를 끝내고 나서 연차를 모아 5일간 떠난 여행이었다.


2.

5일간의 제주여행은 다시 말하면, 5일간 매일 싸던 도시락과 요리에서 기쁘게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자 제주의 새로운 음식들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식"생활의 즐거움을 되찾고 새삼스레 감사하며 누릴 수 있는.

특히나 탈진 상태로 떠난 여행이었기에 나는 되도록 느릿느릿 쉬엄쉬엄 여행했다. 천천히 걷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고 다시 천천히 돌아보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 에너지 소모가 많지 않아도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 여행의 와중에는 늘 금세 배가 고팠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세 끼에 간식을 야무지게 챙겨먹으며 먹고마시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3.

밤늦게 도착해 그대로 숙소에서 잠들었다 일어나 처음 먹은 아점은 고기국수. 서울에서도 이따금 생각이 났지만 서울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맛. 많은 이들이 남기고 일어서는 넉넉한 양에도 바닥이 보일 만큼 비우고서야 일어나게 만든 그 맛.


이호테우해변에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가 햇살이 반짝이는 일렁이는 물결이 한눈에 보이는 카페에 앉았다. 로스팅 커피, 드립전문이라는 말에 드립을 하나 골라 느긋하게 파도에 흔들리는 서퍼들을 구경했다. 찬찬히 커피를 비우다가 직접 만든 당근 케익이라는 문구에 케익도 하나 주문했다. 느긋하게 흘러가는 오후. 기울어지는 햇살이 노을로 바뀔 즈음이 되어서야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 고사리해장국으로 유명한 모이세해장국집. 뜨거운 뚝배기에 뭉근하게 끓인 고사리의 독특한 맛에 찬찬히 음미했다. 꼭 보양식을 먹은 듯 든든한 한 그릇이었다.


아침에는 부두로 갔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은 생선조림 집으로 가서 갈치조림을 시켰다. 무심하게 툭툭 깔아둔 무와 감자 위에 신선한 갈치토막들, 수북히 쌓은 파와 양파, 고추들. 밥 두그릇 뚝딱.

다음날에도 또 다시 카페에서 한참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귤밭에 지은 모던한 건물들. 한 채는 현대미술 갤러리로 한 채는 카페로. 부슬비에도 꿈쩍않고 잠든 멍멍이들을 조용히 지나쳐 노랗게 익어가는 귤 나무 아래에 자리잡았다. 귤파운드케잌에 시그니처 커피라는 텐저린라떼.

한라산을 지나 서귀포로 내려와 해물탕을 먹었다. 수북히 쌓인 해산물 그리고 콩나물과 대파, 버섯, 갖은 양념의 다대기. 역시 바닥을 드러내게 싹싹 긁어먹고서야 뿌듯하게 가게를 나섰다. 음식을 과하게 시키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남겨서 음식물쓰레기를 만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에서 음식을 시킬 때도 먹을 때도 마찬가지. 남은 건 수북한 전복껍질과 게 그리고 새우의 날카로운 수염뿐. 숙소로 돌아와 아쉬운 마음에 제주 막거리를 땄다. 새콤달콤한 향에 자꾸만 손이 가서 결국 한 병을 다 비우고 잠들었다.

큰맘 먹고 좋은 숙소를 골라 묵었다. 따뜻한 수영장도 갖춰진 호텔. 여행중에는 설레서 그런지 피곤한 와중에도 일찌감치 잠이 깼다. 호텔 레스토랑의 조식을 먹으며 바다 너머로 이제 막 떠오르는 해를 지켜봤다. 다양한 메뉴 중에서도 특히나 제주도라는 걸 실감하게 했던 시원한 홍합탕.

다시 도로를 달려 한라산 중산간을, 1100고지를, 습지대를 거닐고 제주시로 갔다. 역시나 귤밭과 숲을 배경으로 둔 카페에 들러 가을 코스모스와 귤나무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즐겼다. 신선한 무화과 타르트와 진하고도 부드러운 커피에 눈이 번쩍. 다시 달려 바닷가에 예약해둔 숙소로 짐을 옮기고 나와서 찾은 자매식당. 식당마다 다른 고기국수의 고명과 국물맛, 비빔국수까지 더해 비교해보며 즐기는 꿀맛.

여행중에는 세끼가 네끼, 다섯끼가 되기도 한다. 수영을 하고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굳이굳이 이끌고 찾아간 근고기집. 기름칠한 돌판에 김치와 콩나물, 멜젓, 쌈채소까지.

무슨 말을 더할까. 맥주 한 잔을 더할 밖에. 근처에 눈여겨봐두었던 호스텔 겸 생맥주바에 가서 제주맥주를.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을 아쉬워하며 다시 새로운 하루. 혼자 고즈넉이 숙소 라운지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은한 차와 함께 사색 그리고 작업을 이어가다 말고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파도에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해녀들을 발견하고는 넋을 잃고 그들의 작업을 지켜봤다.


다시금 느긋하게 새로운 식당탐험. 해물라면과 딱새우 무스비같이 생긴 김밥를 야무지게 먹고 어슬렁어슬렁 제주시내를 걷다 동문시장에 들어섰다.

천혜향 과즙을 디저트 삼아 찬찬히 산책을 하다말고는 홀린 듯이 제주막걸리와 귤와인, 쿠키와 파이까지 미친듯이 사들여 택배사인까지 하고는 다시금 홀린 듯이 수산시장길로 들어섰다.

저녁막바지 세일을 외치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에 끝내 지나치지 못하고 골라온 갈치, 고등어, 돔 회. 한라산소주와 천혜향쥬스를 토닉워터와 함께 믹스에 간단히 칵테일을 만들었다. 찻잔을 칵테일잔 삼아 술을 홀짝였다. 땅거미 속에 어두워지는 한라산의 능선과 고등어와 갈치회를 안주로 마지막 밤을 보냈다.


4.

사진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2021년 늦은 여름 아니 초가을 제주의 맛들을 떠올린다. 다시 그 순간이 그 맛과 더불어 냄새, 소리, 사람들, 풍경이 떠오르고 입에는 침이 고인다. 새삼 여행은 맛을 되살려주는 무엇임을 확인한다. 나도 모르게 그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짓는다. 다시금 길 위에 서고 싶게 만든다. 여전히 피곤에 찌든 몸임에도 그날을 그리며 일을 잘 마무리짓고 휴식도 하고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다. 그래, 음식은 나에게 이따금 순간순간이 주는 기쁨을 확인하게 하는 그리고 다시금 그것을 기대하게 하는 무엇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