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요리는 생일을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의"식"주 일상 실험

by 문성 moon song

1.

긴 휴가를 다녀와서 곧 10월이었다. 기어이 연차를 많이 써서 휴가를 다녀온 건 곧바로 이어질 많은 일들 때문이기도 했다. 도록의 마무리작업, 전시연계프로그램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해야할 일들이 이어졌다. 오픈리서치랩이라는 성북의 지역예술실험에 합류해 시작한 글과 그림 작업에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틈틈이 청년예술청과 함께하는 청년기획자플랫폼11111에서의 활동도 이어가다보니 다시 또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부산히 움직여 뛰어다니며 하나씩 일을 마무리지을 때마다 피곤이 쌓여갔다. 평일저녁에도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지는 와중에 식사를 챙기는 일은 버거운 일 나중에는 귀찮은 일이 되고 있었다. 나는 너무 힘든 날에는 외식도 배달음식도 먹었다. 인스턴트와 반조리식품들도 역시. 다만 거기에 신선한 재료들을 더해 조금 더 균형있게 먹으려는 노력하며 바쁜 나날을 버티고 있었다.



들깨를 듬뿍 넣은 콩나물해장국. 코로나19백신을 맞으러 가는 길에 빈속을 든든히 달래고 씩씩하게.

레토르트 죽도 뚝배기로 옮겨 은근한 불로 데우고 참기름과 겉저리를 더하면 근사한 한끼가 된다.

양배추 한 통은 프랑스식 코올슬로로 만들어두고 샌드위치 속재료로, 파스타의 곁들임 샐러드로 쓱싹.

냉동야채는 생야채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며 가성비좋은 요리재료. 파스타 샐러드에도, 마파두부에도, 짜장소스로 만든 퓨전식 파스타에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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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요리를 할 엄두가 나지않을 때는 레트르트 죽. 라면이 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김치나 물김치, 대파와 오이, 달걀로 나머지 영양소의 균형을 맞춰본다.


피로가 누적되면서 혼자 집에서 가볍게 한 잔씩 마시는 걸 즐기게 되었다. 코로나로 술집에 앉아있기도 눈치보이고 피곤함 몸뚱이를 끌고 다시 집에 오는 것도 부담스러운 차에 제주여행에서 택배로 부친 막걸리, 귤와인들이 도착하면서 간단히 요리에 술 한잔을 견들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 잔을 넘어가면 다음날 일어나는 게 더 힘들어질 수 있으니 오히려 주의하게 되고 폭음하던 습관도 다시 돌아보게 됐다.


2.

피곤에 절어가면서도 10월은 나에겐 축제같은 달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나의 생일, 세째언니, 큰언니의 생일, 아빠의 생일이 연달아 있어 어린 시절부터 10월만 되면 가족들의 생일축하를 기다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불어 월초부터 이어지는 빨간 날들은 더더욱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서늘하고 쾌적한 날씨, 파아란 하늘과 나날이 짙어가는 단풍이 어우러져 햇살속에 눈부신 풍경들. 넘쳐나는 축제와 행사들로 무심코 거리를 걷다가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행복한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계절. 그래서 10월 중순이 생일임에도 10월이 시작되면 매일이 내 생일인 듯 기분이 좋아지고 작은 즐거움에도 더욱 행복해지곤 했다.

올해에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나는 바쁜 10월의 일정을 생일축하 선물처럼 여기며 일을 해나갔다. 예술의 언저리에서 예술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는 나의 일만큼 보람있고 뿌듯한 일이 어디있겠느냐고, 이보다 더한 생일축하선물이 무엇이겠느냐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그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날짜를 가늠하던 전시연계프로그램, 북촌창우극장과의 연계 우리소리음악축제가 내 생일에 열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에서 연주자들과 무대팀, 음향팀 등의 축제스탭들과 동동거리면서도 청량한 하늘아래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음악에 무거운 발을 멈추고 기뻐했더랬다.

모든 업무를 마친 생일저녁 기절할 것 같은 몸상태에도 나는 기어이 친구를 끌고 근사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니, 근사한 저녁을 먹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돈을 벌며 자립하게 된 순간부터, 나에게 생일이란 누군가의 축하를 받기보다는 내가 나자신을 오롯이 아껴주는 날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생일이 되면 평상시에는 감히 생각해보지 못했던 식당에서 굳이 고르지 않았던 비싼 메뉴를 고르기도 하고 건강을 생각하며 눈길도 두지 않았던 특별한 디저트를 먹기도 했다. 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생일 당일 나는 지친 몸을 끌고서 멋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따뜻하고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도 바쁜 틈틈이 시간을 쪼개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나 그날이 마치 생일인 것처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근사한 음식은 나에게 힘든 순간에 위로를 행복한 순간에 더욱 행복을 더하는 무엇이 되었다.


생일에 일하는 내게 동료선생님이 선사한 깜찍한 선물. 너무 예뻐서 먹는 게 아깝다고 고민한 순간은 단 몇 초. 행사에 지친 몸에 당분은 입에 넣자마자 위안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찾아간 이탈리안 레스토랑. 푸짐히 해산물을 담아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넉넉히 넣어 뭉근히 끓인 해산물 토마토스튜. 신선한 채소와 마리네이드된 문어, 감자로 맛을 낸 리조또. 추위와 피로로 뭉쳐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 했다.


근사한 저녁은 며칠씩 계속 이어졌다. 이 정도 사치를 부리지 못하면 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듯해서 생일을 축하해주는 친구와 함께 맛있는 백짬뽕을, 입에서 사르르 내려앉는 동파육을 먹었다. 그윽한 얼그레이향이 퍼지는 쉬폰케익을, 한창 익어 달콤하게 혀끝을 감도는 무화과 타르트를, 나누어 입에 넣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간의 일년을 기특해하고 다음 일년을 격려하며 그렇게 근사한 음식들과 함께 나의 10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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