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는 시간을 갖고 싶을 때,
모카포트와 칵테일 키트

의"식"주일상실험

by 문성 moon song

1.

모카포트와 칵테일 키트를 장만했다. 6월 말 퇴사를 한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었다. 2년 가까이 개관하는 박물관의 바쁜 근무에 수고했다고 스스로 다독여주고 싶었기에 갖고 싶었던 것을 나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 이제 한숨 돌리고 여유를 가졌으면 했기에 찬찬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기도 했다. 커피와 혹은 칵테일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는 늘 편안한 음미의 시간이었기에. 어쩌면 그간 있었던 많은 일들 또한 음미하며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프리랜서로 하던 일들이 흔들리고 앞날이 불투명해지던 와중에 큰 조직에서 큰 규모의 일에 참여해보자는 마음으로 시도한 새로운 선택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특별전시 기획을 맡고 운영과 연계 프로그램까지 이어 하게 되면서 한편으론 청년 기획자 플랫폼 11111의 기획과 운영까지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주말이나 연휴도 없이 일을 하는 중에 엄마의 증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가족들 모두 힘겨워하던 시간들, 전시를 마무리할 무렵 엄마를 보내고 또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몇 가지 맡아 다시 일상에 적응하려 애쓰며 지금까지 온 것이었다.


2.

조금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쇼핑이기도 했다. 물건을 늘리는 걸 좋아하기는커녕 갖고 있는 물건도 줄이고 싶어 안달하는 편인데도 굳이 새로운 걸 그것도 두 종류나 사들이는 건 평상시의 나하곤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래도 일상 속에서 작은 즐거움들을 만들고 싶었다.

6월 말 퇴사 직전까지 프로젝트들을 인수인계하고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미 악화된 목디스크가 더 심각해진 상황이었다. 조금만 집중해서 책이나 폰을 보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면 목과 어깨, 견갑골과 팔까지 통증이 나를 쑤셔댔다. 신경줄들이 내 목과 어깨를 잡아당기며 이제 그만 너덜거리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할 시간이라고 비명을 질러대는 듯했다. 퇴사를 기다린 것처럼 다음날부터 심각해지는 통증 속에서 낙심만 하고 싶지 않아 애써 벌인 일이기도 했다.

앉아있는 것도 서있는 것도 누워있는 것도 편치 않은 통증 속에서 짬짬이 검색으로 비알레티 모카포트 인덕션용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물품으로 구성된 홈 칵테일 키트를 골랐다.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던 어느 날 배달된 박스 두 개를 행여나 젖을까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둘러 폼에 앉았다. 통증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물건을 집어 드는 게 힘들어 동작을 멈추기를 반복하며 느릿느릿 구성품을 확인하고 설명서를 읽었다.


3.

둘 다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라 연마제를 제거하고 길들이기가 필요했다. 모카포트는 비알레티 설명서와 바리스타들의 안내법을 몇 가지 찾아보고 커피를 몇 번 내리고 드디어 진짜 마실 커피를 내릴 준비가 끝났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카페인 때문에 잠을 못 잘 걸 알면서도 나는 커피를 끓였다. 느릿느릿 하지만 정성을 다해 물을 채우고 조심스레 커피가루를 얹어 꼭 조였다. 오래전 맛보았던 모카포트 커피의 진하고 부드러운 맛을 떠올리며. 약한 불에 압력으로 커피가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그윽한 커피 향 그리고 진하고 부드러운 맛까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나는 예전처럼 몇 모금에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커피의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이제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메뉴가 되고 있다. 모카포트에서 끓인 커피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라 입안에 머금고 음미하며 전날을 돌아보고 그날의 할 일을 생각할 시간을 준다.


4.

처음으로 모카포트로 끓인 커피를 마시며 칵테일 키트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성품 모두 하나씩 기름을 먹인 종이로 연마제를 닦아내고 뜨거운 물에 식초와 함께 끓이고 연마제가 묻어나는지 확인 후 다른 식기들처럼 세척해 건조하는 것까지 마치고 나자 저녁이 다 지나 있었다. 며칠 째 통증은 조금 나아지는가 싶다가 악화되기를 반복해 결국은 새로운 병원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물관 근처에 다니던 병원에 찾아가 기록을 받아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와 진단을 진행하고 약을 타고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소염진통제에 알코올은 당연히 포기해야 했기에 본의 아니게 더욱 느리게 칵테일 만들기를 준비했다.

검색으로 책을 찾아보고 서점과 도서관을 확인해 책을 빌리고 또 인터넷의 칵테일 만드는 법도 틈틈이 찾아보았다. 덜거덕 거리는 목을 부여잡고 대형마트에도 백화점에도 가서 칵테일의 베이스가 되어줄 술들을 둘러보고 가격들을 비교해본 후 초보자가 다루기 쉬운 보드카와 말리부, 피나콜라다 믹스, 오렌지주스와 레모네이드 주스를 샀다. 마지막으로 얼음을 얼리기 위한 얼음틀까지 사고 나니 칵테일을 만들 준비는 다 된 셈이었지만 여전한 통증과 소염진통제 복용으로 칵테일은 언감생심이었다.

통증이 완전히 없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통제로 통증을 없애는 것보다는 통증을 목에 나쁜 자세를 알려주는 경고음으로 여기라는 디스크 전문가의 조언에 며칠 전부터 진통제 먹기를 멈췄다. 어찌 됐든 이 통증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임을 깨닫고는 나는 처음으로 칵테일을 만들었다. 얼려두고 사용하지 못했던 얼음을 꺼내고 셰이커에 지거를 이용해 무색무취의 보드카에 상큼한 레모네이드와 오렌지주스를 넣어 흔들었다. 과일의 새콤달콤함과 알코올의 짜릿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부드럽게 섞여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얼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며 지나온 날들을 함께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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