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적는 건 위로를 얻는다는 것

의식주 일상 실험

by 문성 moon song

1.

한동안 일상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내가 적는 것이 쓸데없는 공간 낭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였다.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이전처럼 주기적으로 일상에 대한 글을 쓰는 게 어려웠다. 요리에 재미를 붙여나가던 시기라 이전의 글도 대부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거기에 이어 모아둔 요리와 음식 사진들을 올리고 글을 적어나가는 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먹는다는 건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해야 하는 일과이자 생명유지를 위한 행위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목도하고는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을 모아 만들어 먹고 치우는 일련의 과정을 글로 적는 일은 더욱.

어찌 됐든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며 나 자신과 약속한 것이 있었다. 주어진 시간을 어쩔 수 없이 흘려보내고 후회하며 죽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소중히 여기고 알차게 쓰고 후회 없이 맞이하자는 것.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도 일상을 글로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일상을 글로 남기는 게 나에게도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공개적으로 적어 내려 간 일상이 과연 다른 이들이 읽을 만한 것인지,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건지 그렇지 못하다면 하다못해 재미라도 있는 건지, 자신할 수 없었다. 브런치든 블로그든 유튜브든 이제는 유용한 정보 전문적인 식견 뛰어난 안목을 가진 이들의 풍부한 콘텐츠가 넘쳐나지 않는가. 그들을 보며 감탄하다가 내 글을 다른 이들에게 읽으라 하는 건 오히려 데이터 낭비가 아닐까, 나 역시도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회의가 일었다.

한편으로는 오래도록 업데이트되지 않은 매거진 "일상이 실험 인생이 장난" 글목록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따금 브런치에서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알람을 확인할 때마다 글쓰기를 이어가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다. 끝내지 않고 고민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는 찬찬히 다시 되짚어본다. 일상을 쓰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2.

처음 일상을 쓰기 시작한 건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대학 진학도, 복수전공도, 졸업 이후의 진로도, 진로를 정하고 나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프리랜서를 오가는 일의 방식까지.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나의 선택들은 내가 속해 있던 모집단에서 늘 다른 선택, 소위 '튀는' 선택이었기에 지지나 격려보다는 우려와 걱정을 한 몸에 받았었다. 지금까지의 선택들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종종 홀로 조류를 따르지 않아 세차게 물살을 맞는 듯한 순간을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곤 그때마다 선택의 결과인 나의 일상을 차분히 돌이켜보노라면 여전히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곤 다시 기운을 내곤 했다. 그러다 문득 매번 거꾸로 물살을 맞는다고 느끼는 순간 나를 돌아보느니 내가 먼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적어보는 게 어떤가 싶었다. 그렇게 영화 리뷰나 시각문화와 같은 특별한 주제를 넘어 나의 일상을 다루는 매거진 "일상이 실험, 인생이 장난"을 시작했다.

나의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낸 나의 일상을 스스로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정신없이 흘려보내지 않고 돌아보며 점검하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고 싶었다. 비록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사소한 순간들임에도 글로 적다 보면 나 자신과의 대화가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브런치에 공간을 마련했기에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을지는 미지수였다. 오히려 나의 삶의 방향을 정리하고 점검하는 나 자신을 위한 선언이자 지침과도 같다고나 할까. 다만 어딘가에 나와 같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나의 글이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3.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사소한 순간들을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을 때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를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닿을지 장담할 수 없어도 편지를 적어 바닷가에서 편지를 담은 병을 바닷물에 띄워 보내는 심정으로. 이따금 상상하곤 했다. 글을 읽은 이들의 숫자가 알림으로 울릴 때, 라이킷을 눌렀다고 알람이 울릴 때, 누군가가 재미있게 읽었다면 조금 더 나아가 자신의 지극히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순간들에도 위로를 받았다면, 됐다. 그것으로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에 대한 글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 글들을 읽는 이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다. 조회수가 늘어나고 구독자가 늘어가도 숫자만으로는 모니터 화면 너머 어떻게 글을 읽었을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지 그려보는 것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규칙적으로 적으려 노력했을 뿐.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고 일도 많아지면서 몸도 마음도 분주해 글을 쓰는 자리에 진득이 앉아있기가 어려웠고 일상을 돌아보는 글도 점점 짤막해졌다. 그러나 나는 일상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구독자의 수도 라이킷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쫓기듯 초조한 마음으로 버티다시피 보내는 하루하루에 구독자와 라이킷의 숫자는 그 실체를 상상할 수 없어도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나의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바람대로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반대로 내가 위로를 받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는 엄마가 돌아가셨다. 앞서 적었다시피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나는 일상에 대해 거의 쓰지 못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하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그 속에서 경험한 것들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글은 쓰면서도.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3천을 넘어 4천에 다가가던 구독자의 숫자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도. 구독자들이 떠나고 나서야 일상에 대한 글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거나 재미를 주었나 보다 확인한 셈이었다.


4.

적어 내려 가며 깨닫는다. 어차피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취향 이야기이니 백과사전적인 정보도 직업적인 전문성도 압도적인 안목도 필요 없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구독자들, 라이킷을 눌러주었던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임을.

나의 일상을 함께 읽고 또 라이킷을 누르며 공감해준 당신들 덕분에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힘을 낼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싶다. 나의 지극히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취향을 담은 일상적인 이야기가 반창고 같이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참 기쁘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이미 당신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기에. 앞으로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자세히 적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금 지극히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취향이 담긴 일상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나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보고자 한다. 나의 일상을 읽게 된다면 이런 사람도 있구나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으니 나 역시 괜찮구나 하고 당신의 마음이 잠깐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맞이하는 일상을 더욱 소중히 그리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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