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로서의 뮤지엄
1. 뮤지엄의 역할가늠에 학예업무를 살피는 이유
뮤지엄은 그 탄생부터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따라서 현재에 이르는 정의를 보아도 그것이 속한 사회를 넘어 인류공동의 문화예술적 자산이자 그것을 함께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공공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해 왔다. 뒤집어 말하면, 뮤지엄이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가 바로 뮤지엄을 가늠하거나 평가하는 데에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뮤지엄이 '문화예술적 자산'을 '함께 향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뮤지엄이 그 역할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지 논의가 가능하기에 이를 위해서는 뮤지엄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이들, 학예사들의 학예업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이전의 글에서 검토한 바를 간략히 정리하면, 각 학예업무의 범위와 그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그에 따른 뮤지엄의 공공재로서의 역할, 혹은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고 이는 실제 우리가 방문하는 뮤지엄들을 이해하는데, 나아가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분야의 일원이자 연구자로서 뮤지엄 내외에서 일하는 과정에서 궁극적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는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감히 더 욕심을 낸다면, 이 글을 읽고 누구든 뮤지엄을 향유하고 누리는 주체로서 뮤지엄의 역할과 방향에 대해서 의견을 내고 논의에 참여하며 공공재로서의 존재이유를 다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준다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2. 학예업무의 구체적 분류
국립중앙박물관이 제시하는 학예사 자격인정 기준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박물관협회에서 발간한 학예전문인력 업무 표준안을 바탕으로 실제 뮤지엄에서 이루어지는 혹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되는 학예 업무를 특성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조사와 연구를 기본으로 크게 네 가지의 업무, 즉 1) 자료의 수집과 관리, 보존 2) 전시의 기획 및 운영 3) 교육 및 행사 프로그램 기획 및 운영 4) 뮤지엄 특성을 고려한 홍보와 관람객 응대 등의 뮤지엄운영과 관리
3. 뮤지엄의 미션과 비전에 좌우되는 학예업무
그런데 그간의 업무경험과 다양한 뮤지엄들의 사례를 떠올려보건대, 학예업무의 가장 앞에 괄호를 치고서라도 추가해야 할 문구가 하나 있다. 바로 '뮤지엄의 미션과 비전에 따른'이라는 문구이다. 모든 뮤지엄은 그들의 지향하는 가치나 철학을 밝히고 이를 어떤 방향으로 선보일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보통은 이를 미션 mission과 비전 vision이라 칭하고 압축적인 문구나 간략한 문장으로 갈음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확인해 보면 뮤지엄의 목적과 방향을 확인할 수 있고 그것으로 공공재로서의 뮤지엄의 존재이유에 부합하는지 여부 역시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만약 어떤 뮤지엄의 미션이나 비전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면- 박물관학과 박물관교육을 가르치던 어느 교수님은 실제 유명한 뮤지엄들의 미션과 비전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며 유명한 곳이라 해도 미션과 비전을 새롭게 바꾸는 과정에서 이런 실수가 종종 보인다고 솔직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공공기관이 대중친화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면서 미션과 비전에 더욱 많은 것을 포함시키려하고 더불어 추상적이고 모호해지는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추세인 듯 하다. - 그런데 이는 뮤지엄에서의 업무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수집방향을 비롯해서 전시, 교육, 홍보까지도 그 범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구난방의 소장품, 주제가 일관되지 않은 전시나 교육, 홍보를 생각해 보라. 결국 정리하자면, 학예업무를 해 나갈 때에도 뮤지엄의 미션이 업무의 궁극적인 목표 그리고 비전이 업무의 구체적인 방향성의 역할을 하며 학예업무 과정에서의 복잡한 취사선택과 우선순위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4. 역으로, 학예업무에 의해 좌우되는 뮤지엄(미션과 비전)의 가능성과 한계
다음으론 네 가지 업무가 미션과 비전에 맞게 진행되고 있는지 여부가 공공재로서의 뮤지엄의 존재이유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이차적으로 확인하게 해 준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조사와 연구가 기본이 된다는 것과 특성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했지만 각각은 따로 진행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각각이 긴밀히 연결되어 시너지를 주고받는다면 결국은 각 업무가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며 -예를 들면, 수집된 소장품들이, 개최되는 전시가, 교육과 행사가, 홍보와 관람객의 응대까지도- 그 뮤지엄이 추구하는 바를 충분히 보여주게 된다.
업무의 유기적인 진행과정과 흐름을 고려했을 때 학예업무를 간략한 개념도로 그려보자면 위와 같다. 네 가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됨에도 분류하는 것은 하나하나가 고유한 관점과 방법론을 발전시켜온 전문분야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규모가 있는 뮤지엄에서는 네 가지의 업무는 레지스트라, 전시큐레이터, 에듀케이터, 홍보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진행되지만 학예사가 한 명뿐인 뮤지엄에서는 한 명이 네 가지 업무를 모두 전담하기도 한다. 당연히 기관의 규모나 업무인력의 규모에 따라서 수집의 양도, 전시의 규모도,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행사나 홍보의 규모 역시 좌우된다. 각 분야의 인력이 상주한다면 모르겠지만 한 명의 인력이 전공분야가 수집이나 유물관리, 전시기획, 혹은 교육기획, 무엇인지에 따라 중점을 두게 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분야가 강점이 되는 동시에 나머지에 여력이 없거나 한계가 생기는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기관의 미션과 비전이 구체적으로 실행된다는 건 학예업무의 실제에 의해 그 가능성과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기관의 크기나 예산이 클수록 당연히 전시가 더 좋고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더 좋다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크기와 예산의 기관이 있고 이들에게 적합한 미션과 비전으로 학예업무를 진행해나가야 하므로 당연히 기관의 규모와 예산에 맞는 미션과 비전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전문성과 개성이 넘치는 전시, 프로그램, 행사를 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주어진 조건과 한계들을 넘어서 최대한을 만들어내는 것은 큰 기관이든 작은 기관이든 마찬가지이고 어쩌면 작은 기관에서 다양한 업무를 혼자 해내야하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조건과 한계든, 주어진 바탕에서 최대한 멋지고 아름답게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 학예업무를 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작지만 개성있는 전시와 실험적인 프로그램에서만 경험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관람객들도 알았으면 바라는 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