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 중 만난 쌀국수 이야기
한낮의 더위가 아직도 여름의 끝자락을 느끼게 하는 추석. 다들 풍성한 한가위를 맞았을까. 이미 오래전부터 명절이라기보단 휴일로 여기며 지낸 터라 간단히 보내고 나니 조금은 허무한 명절 끝자락. 누가 먹보 아니랄까봐 송편 하나 먹지 못하고 보낸 까닭에 이리 아쉬운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쉬움을 달래며 그간 올리지 못했던 베트남 음식이야기를 풀어본다.
베트남음식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은 바로 쌀국수였다.
쌀국수, 포, 분보. 세 단어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듯 보통 쌀국수라 하면 베트남식 쌀국수를 떠올린다. 포로 시작하는 쌀국수 프랜차이즈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포가 쌀국수를 뜻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나도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다가 베트남에 와서야 현지인들은 대부분 쌀국수를 분보라 쓰고 읽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소고기로 낸 맑은 국물에 쌀로 만든 면 그리고 다양한 채소와 향신료를 곁들여 먹는 쌀국수는 그야말로 베트남의 대표적인 메뉴. 나에게는 베트남여행을 내내 즐겁해준 소울푸드와도 같았다.
당신은 이들이 무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노이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 일어나자마자 식탐 많은 나답게 국물맛으로 유명한 쌀국수집을 찾았다가 이른 시간부터 늘어선 줄에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베트남도 다른 동남아국가들처럼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듯 했다. 집밖으로 나서면 골목길을 오가며 지게에 든 식사거리를 파는 상인들부터 이렇게 문을 활짝 열고 분주하게 손님들을 맞는 식당까지 어디서나 쌀국수를 파는 곳을 찾을 수 있었고 대부분 자기집에 식사를 하러 온 듯 느슨하고 풀어진 모습으로 앉아서 쌀국수를 먹고 있었다.
내가 소개했던 "맛있는 베트남"의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현지인들이 먹는 것들을 그들이 먹는 것처럼 먹어 보고 싶었기에 처음 가리라 마음먹었던 론리플래닛에 나온- 외국인들도 동참해서 줄이 늘어선- 쌀국수집을 지나쳐 그 옆에 현지인들만으로 북적거리는 쌀국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바깥의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들이 대부분 차 있었지만 다행히 안쪽에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다. 누가 봐도 여행객인 내가 들어서자 모두들 나를 호기심반 의아함반으로 쳐다보는가 싶더니 금세 앞에 놓인 아침식사에 골몰하고 있었다. 분주하면서도 차분한 그 분위기가 좋았다. 입구의 커다란 솥은 하얀 김을 쏟아내며 펄펄 끓고 주인아저씨는 날랜 손놀림으로 준비된 면과 육수를 먹기좋게 담아 날랐다.
사실 포는 다양한 육수를 선택할 수 있고 동일한 육수에도 고기 부위를 다양하게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위 메뉴판만 봐도 얼마나 다양한지 금방 눈치채시리라.
내 앞에 도착한 분보 국물을 한 숟갈 먹었을 때 지금까지 한국에서 먹었던 쌀국수는 분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육수의 맛과 육즙과 감칠맛이 풍부한 고기에 적당히 익힌 쌀국수의 면발. 이름을 알 수는 없어도 제각기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적어도 대여섯가지가 넘는 향신채소들과 라임 그리고 고추를 비롯 여러가지를 잘게 썰어넣은 양념들은 기본육수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맛이었다.
하노이를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분보를 맛봤고 어느 곳에서든 분보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여행을 오기 전 영국인 저자가 열변을 토하던 분보 이야기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터라 베트남 각 지방마다 분보의 스타일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지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각 지방의 특성에 따라 국물을 내는 방식이나 곁들여 먹는 채소들 그리고 양념들이 달라졌지만 어디서든 분보는 맛이 있었기에 나는 그 미묘한 변화들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분보후에는 후에지방의 분보를 부르는 말로 하노이의 분보와 달리 붉은 색의 국물이 특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해장국의 칼칼한듯 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닮은데다 고기완자와 선지까지 들어 있어 정말 해장국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밤새 기차를 타고 흔들리며 와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를 맞아 지친 몸을 달래주는 속풀이 해장국.
나짱으로 내려가자 채소들은 더욱 많아졌다. 가짓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채소들을 단 한가지 요리 분보에 그것도 국물에 곁들여 먹기 위해 쓴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정작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하나하나 맛이 달라서 국물맛에도 새콤하기도 하고 쌉싸름하기도 하고 달큰하기도 한 미묘한 변화를 주고 씹을 때면 맛과 향이 다채롭게 흩어지며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었다. 입안 가득 쌀국수면과 채소를 씹으며 배어나오는 국물을 음미하다보면 꼭 입안에서 불꽃놀이 폭죽이 화려하게 터지며 흩어지는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맛보았던 것은 호치민의 유서깊고도 유명한 식당의 분보였다. 오랜 시간 유명세를 감당해온 식당은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식기들의 닳고 낡은 그 모습만으로도 그곳이 얼마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액자와 설명 그리고 갖가지 안내들도 역시 그곳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 동네 사람들, 그곳에 사는 외국인들, 여행객들이 뒤섞여 소란스레 주문을 하고 먹고 마시는 동안에도 그곳의 종업원들은 질서를 잃지 않았고 재빠르게 안내하고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산을 했다.
분보는 역시 맛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굳이 하노이의 분보와 비교한다면 호치민의 것은 풍미가 훨씬 더 진하고 채소도 양념도 역시 진하고 깊은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지. 당연히 가장 남쪽에 물자가 풍부한 대도시인만큼 채소 역시 가장 다양하고 양도 역시 푸짐했다. 하노이의 분보가 담백하고 소박한 군더더기없는 맛이라면 호치민의 분보는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기술과 재능을 뽐낸 맛이라고 할까.
마지막 분보를 먹으며 생각했다.
아마도 다시 베트남에 오지 않는 한 여기에서 맛본 분보와 같은 걸 먹을 수는 없으리라고. 분보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베트남에 여행오기를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