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 또 다시 기온이 치솟아 후텁지근하더니 밤에는 비가 쏟아졌다. 내려간 기온은 오늘 다시 치솟았다가 구름이 밀려든다. 바람이 심상치 않은 게 금방이라도 비를 흩뿌릴 것만 같다. 가을로 달음질치다가 머뭇거리고 또 다시 여름으로 뒷걸음질하는 오락가락하는 날씨. 그럼에도 폭염에 비하면 천국같은 쾌적함을 누리고 있는데 어째서 몸도 마음도 이리 무기력할까. 옴짝달싹하지 않고 쉬고만 싶다. 몸이 아파도 배고픈 건 못 참던 나는 끼니도 건너뛸 만큼 식욕을 잃었다. 여름내내 더위에 시달려 지쳐버린 건가.
베트남사진폴더를 열어 베트남음식 사진들만 모아본다. 한 장 한 장 모니터를 채울 때마다 그 순간의 맛과 향, 질감과 씹는 소리가 떠오른다. 저절로 침이 고이고 한국의 어떤 베트남식당에서도 다시는 맛볼 수 없었던 그곳의 맛이 그리워진다. 그래, 식욕타령은 핑계다. 베트남 음식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첫날 먹는 방법을 손짓으로 물어가며 먹었던 분짜, 아침일찍부터 길게 줄이 늘어선 관광객들이 택한 집을 두고 현지인들로 북적거리던 집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아 김이 오르는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감동을 받았던 분보, 숙소앞 골목길 할머니가 팔던 따끈하던 바나나잎에 싼 찹쌀떡 꾸온, 배가 터질것 같은데도 노점상이 나타날 때마다 사먹을까말까 심각히 고민하게 했던 반미, 베트남 음식은 베트남여행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미처 다 경험해보지 못하고 여행이 끝나는 걸 아쉬워하며 꼭 다시 와서 맛보리라 다짐하게 만들었다.
베트남음식이 베트남의 긴 역사를 바탕으로 깊고 다양하게 발전해왔다는 걸 아시는지? 내륙과 정글, 바다를 접하고 풍부한 식재료로 각 지방마다 다양한 요리와 요리방법을 자랑한다는 걸 아시는지? 고백컨대 나는 몰랐다. 여행준비를 위해 론리플래닛의 베트남 역사축약본과 음식사를 읽고 나서야 그들의 풍부한 음식문화가 세계적으로도 그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베트남음식에 대한 궁금증은 <맛있는 베트남>(원제eating vietnam)으로 기대로 바뀌었다. 작가 그레이엄 홀리데이의 좌충우돌 베트남 음식 경험기와 베트남 음식이 갖는 훌륭한 맛과 독특한 풍미, 그 속에 어우러진 베트남인들의 문화와 삶을 읽노라면 어서 빨리 나 역시 베트남 음식을 맛보고 싶을 뿐이었다.
제일 처음으로 느낀 것은 연기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냄새.
어디선가 고기를 굽고 있다. 바로 근처에서.
.......
연기는...자기를 쭉 들이키고 물고 뜯고 가라고 유혹했다.
때는 9월초, 평소처럼 뜨겁고 습한 하노이의 일요일 정오쯤이었다.
분짜,<맛있는 베트남>에서, 그레이엄 홀리데이
실제로 베트남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분짜를 맛보던 그 순간, 나는 기대를 뛰어넘는 맛에 게걸스럽게 먹어댔고 만족감에 취해 옆자리에 앉은 현지인들에게 엄지를 치켜보이며 그들과 행복에 겨운 미소를 주고 받았다. 책에서 작가가 분짜를 시작으로 베트남음식과 사랑에 빠졌듯 나 역시 그렇게 사랑에 빠져 여행 내내 먹고 마시고 또 먹고 마시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먹고 마시지 못해 안달을 냈다.
베트남음식을 떠올리며 애정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지는 나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그래도 여기에 소개하고 공유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나처럼 베트남음식이라는 새로운 미각의 세계를 맛볼 수 있기를 그 풍부함 속에서 맛과 멋을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엿보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건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수식어가 과해지는 걸 알면서도 돌아가지 못하고 이어지는 커서를 보니 사랑하는 무엇을 알리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어쩌면 본능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고픈 욕심에 우선 베트남음식의 다채로움부터 담아본다. 아니 사실 베트남의 음식은 여기의 메뉴만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다. 뿐만 아니라 격차도 고급레스토랑, 대중적인 식당, 노점상,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들까지 너무나 크고 다양해서 똑같은 메뉴를 먹는다 해도 천차만별의 맛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어떤가. 너무 많은 메뉴에 그닥 눈길이 가지 않고 정신이 없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들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하나씩 들여다보며 궁금해하고 개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걸 보며 기억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충분하다. 당신은 나처럼 베트남 요리에 기대하고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것 같다. :)